▲이재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20세기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를 주제로 한 연속 강좌가 17일 서울 동교동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개강했다.

느헤미야와 현대기독연구원이 주관하는 이번 강좌는 6주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열리며, 최근 출간된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의 시대>를 번역한 이재근 박사(합동신대원)가 강연을 맡았다. ‘20세기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를 주제로 진행된 첫 강좌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역사와 20세기 복음주의의 주요 주제들을 개관하면서, 복음주의의 정확한 의미를 탐색했다.

이 박사는 “한국 교계와 교회, 신학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 하나이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정의내리기 힘든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복음주의’”라며 “모두 다 ‘복음주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다 다른 의미, 즉 각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는 “물론 이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며 “영미권에서도 ‘복음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자주 나오는 단어가 ‘slippery’나 ‘tricky’로, ‘미끄럽고 반질반질해서 붙잡기 어렵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그는 “20세기 후반과 새로운 세기로 넘어오면서 세상은 더욱 복잡해졌고,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더욱 규정하기 어렵게 됐다”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복음주의’에 대해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복음주의는 기본적으로 지난 2천년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한 운동이자 사조이기 때문에, 정의 또한 여러 역사 배경 속에서 다양하게 내려졌다. 오늘날 이 용어의 의미가 복잡해지게 된 데는 이런 역사적 난맥상이 있다는 것. 복음주의는 영어로 ‘evangelicalism’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헬라어 명사 ‘euangelion’이 모태가 됐다. 여기서 ‘eu-’는 좋다·복되다는 접두어이고, ‘angelion’은 소식을 뜻한다. 좋은 소식. 즉 ‘복음(gospel)’은 타락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구원과 소망을 허락하셨다는 것.

이 단어로 확고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칭한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기수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을 핵심 성경구절로 삼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가 바로 ‘복음’이었다. 이에 당시 종교개혁을 일으킨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인)’들을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고도 칭했다. 그래서 유럽 대륙 개신교에서는 ‘루터의 후예들’이라는 의미로 지금도 교단 명칭에 ‘복음주의’가 붙어있는 곳이 적지 않은데, 이는 가톨릭과 반대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후 넓은 의미에서 세계화된 복음주의, 곧 오늘날 알고 있는 영미권 복음주의는 18세기 초 영국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미국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에서부터 태동된다. 이 때부터 지속적 또는 간헐적으로 등장한 부흥운동은 19세기 찰스 피니와 D. L. 무디를 거쳐 20세기 빌리 그래함 등이 이어받는다. 복음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서 영미권 세계 기독교를 장악하게 된 것. 그 중심은 ‘신앙 대부흥’이었고, 새로운 회심 체험과 신앙생활의 갱신이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재근 박사는 “유럽 대륙의 16세기 복음주의가 로마가톨릭 신앙의 비성경적 요소에 저항하여 일어난 개혁운동이었다면, 18세기 이래 영미권 복음주의 운동은 이미 기득권이 된 개신교 정통주의나 국교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며 “20세기의 ‘복음주의’는 한편으로 근본주의, 다른 편으로 자유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복음주의는 당대 근본주의 복음의 핵심을 계승하되, 그들이 갖고 있던 전투성·반지성·반문화성에 저항하며 고립주의·배타주의를 버리고 중앙으로 진출하려던 사조였다. 복음주의가 ‘지배 종교’가 돼 있던 북미에서 19세기 후반 이래, 유럽 대륙에서 진화론과 고등비평 같은 비기독교적 혹은 자유주의적 사조가 몰려 들어오자, 이에 저항하던 이들이 자신을 ‘근본주의자’로 부르며 신앙의 근본을 지키자는 운동이 기원이었다. 이들은 ①성경의 무오성 ②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그리스도의 대속 ④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그리스도 기적의 역사적 실재성 등을 주요 항목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그런데 1920년대에 이르러 미국 내 대부분의 종합대학 내 신학과에서 이 교리 중 다수를 부인하고 자유주의화되고 말았고, 세속 언론과 사회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을 무식하고 편협한 꼴통으로 비난했다. 이에 ‘근본주의자들’은 반대급부로 더욱 전투적이고 반문화적으로 대응하면서 오히려 사회에서 더 고립되고 희화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대 들어, 근본주의 진영의 젊은 학자들은 더 이상 반문화적·비지성적·고립주의적·무작정 전투적 신앙으로는 자유주의와 싸우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스스로의 생존에만 급급한 일종의 ‘섹트(sect)’가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는다.

이에 이들은 근본주의 신앙을 믿고 따르면서도, 태도와 의식을 바꾸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핵심에는 지성운동, 즉 신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 학문적으로 탁월성을 유지하고 문화적으로도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 있었다. 이들의 노력과 네트워크는 풀러신학교와 전미복음주의협회(NAE) 등을 만들어냈고, (20세기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지성과 문화를 무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회의 중심이었던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신(新)복음주의자’라 불렀다.

이 박사는 “요약하자면 복음주의는 단어 속에 나와있듯 복음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복음적·성경적 신앙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뜻한다”며 “신학 진영으로서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은 에큐메니칼-자유주의 진영과 일정한 구분선을 긋고 있는 집단”이라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기본적으로 복음주의는 한 특정 교파나 신학체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또 보편적 신앙고백 아래 묶인 느슨한 신앙공동체이므로 특정 신학 전통만을 독점적·배타적으로 따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장로교인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일 수 있고, 감리교인은 아르미니우스주의적 복음주의자일 수 있으며, 순복음교인은 오순절 계통의 복음주의자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자는 다양한 교파와 전통의 세부적 차이(adiaphora·아디아포라)에 집중하기보다, 개신교 신학의 양보할 수 없는 핵심사항을 공유하는 이들과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려는(신학적 자유주의 에큐메니즘에는 반대하지만) 교회론적 에큐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이재근 박사는 “이처럼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복잡다단했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적 이해 없이 자신이나 상대를 ‘복음주의자’라 지칭하는 것은 그만큼 ‘slippery’하고 ‘tricky’했다”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발전 상황을 바탕으로 복음주의를 대략 정의하려는 학자들이 있었고, 여러 학자들의 시도 가운데 오늘날 가장 권위 있게 수용되고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정의는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 스코틀랜드 스털링대학 역사학 교수의 것”이라고 말했다.

베빙턴이 <영국의 복음주의: 1739-1980(한들출판사)>에서 규정한 복음주의 핵심요소 네 가지는 ‘베빙턴의 사각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회심주의·성경주의·십자가 중심주의·행동주의 등이다. 회심주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이전에 살던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돌아서는 결정적 경험을 말한다. 십자가 중심주의는 이 회심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의미한다. 행동주의는 개인이 받아들인 이 기독론과 구원론은 반드시 다른 이들과 나누게 돼 있다는 것.

성경주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네 꼭짓점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를 계승한 성경주의는 오늘날 복음주의와 비복음주의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성경의 영감 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으나, ‘성경은 모든 영적 진리가 들어있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자 규범’이라는 생각은 복음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핵심이며,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고백한다. 그는 “18세기 이전의 역사적 개신교 신앙고백 및 교리서와는 달리, 19세기 이래 등장한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단과 신학교의 공식 신앙고백서 1항은 성경에 대한 고백”이라고 덧붙였다.

이재근 박사는 이후 ‘미국제 복음주의는 어떻게 세계 기독교로 부상했는가?’,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복음주의는 자신을 어떻게 변호하는가?’, ‘로잔대회 이후 복음주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오순절 운동은 어떻게 복음주의 지형을 바꾸었는가?’ 등을 연속 강연할 예정이다. 이 박사는 “20세기 복음주의는 베빙턴이 주장한 4대 꼭짓점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든,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며 “앞으로의 강연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