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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 붉은 노을

유승준 | 홍성사 | 392쪽 | 15,000원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기나긴 수감 생활과 잔혹한 고문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그의 앙상한 육신은,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십자가 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온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스러져 간 순교자.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이다. 그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자이다. 하지만 이 정도가 전부이다. 순교 이전의 목회와 그가 감내해야 했던 여러 아픔들,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다 갔는지 등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다. 하다 못해 비록 유골은 없지만, 서울 동작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에 그의 묘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은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전문 작가에 의해 쓰였다. 저자는 유족들의 육성과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하여 주기철 목사 부자(父子)의 삶을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특히 막내아들로서 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故 주광조 장로의 삶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저자는 “주기철 목사는 피를 흘려 신앙의 절개를 지켰지만,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그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부담스럽게 여겼다”며 “지금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도, 그의 증거자 주광조 장로도 없지만 한국교회가 살아있는 한 이들의 이야기는 곧 한국교회사요, 순교사이며 살아있는 믿음의 전승이므로 계속 전파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 추모예배가 지난 4월 13일 후손인 주승중 목사가 시무하는 주안장로교회에서 거행됐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린 주광조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 ⓒ홍성사 제공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호를 가진 ‘소양(蘇洋)’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福)이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바꿨는데,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다. 진해 웅천에서 평북 정주 오산학교로 유학을 떠난 주기철은 졸업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조선예수교대학’ 상과대 2기로 입학했지만, 안질이 심해져 낙향하고 만다. 이후 1919년 만세운동을 벌이다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기로 한다.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당시 지역별로 찢겨 있던 학교 분위기를 일신하고,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지만,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에는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 가결을 선포한 홍택기가 있었다. 이후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담임한 이후 아내의 소천과 두 번째 아내 오정모와의 혼인으로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손양원·한상동 목사 등이 경남성경학교에서 그에게 성경을 배웠다.

그는 강단에서 철저히 복음을 고수했다. ‘민족의 광복’보다 근본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산정현교회가 무너져 가는 조선 교회의 마지막 그루터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침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신사참배 거부와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설교는 거기서 나왔다.

아내 오정모 집사의 신앙도 못지 않았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궁핍했지만, 약한 소리와 앓는 소리 대신 감옥에 있는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주 목사의 입관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 비장한 얼굴로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주광조 장로는 순교자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해방 후에도 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도움의 손길 자체를 멀리해야 했다. 평양 장현교회에서 목회하던 큰 형인 주영진 전도사는 아버지를 따라 6·25 전쟁을 앞두고 순교했다.

그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려 하자 할머니를 남겨둔 채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야 했고,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에는 잠시나마 하나님을 떠나 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회심한 후, 전국을 다니며 아버지의 순교 신앙을 알리는 일에 힘썼다. 기업인으로 성공했던 그는 만 60세에 좋은 영입 제안들을 마다하고 극동방송 부사장을 비롯해 한기총과 기독실업인회, 외항선교회 등에서 복음전파와 북방선교에 힘을 보탰다.

▲겉표지를 벗겨 반대로 펼치면, 주기철 목사의 설교 ‘일사각오’가 수록돼 있다. ⓒ이대웅 기자

저자는 “주광조 장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음 세대에게 역사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기철 목사와 함께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와 큰 형님의 순교를 통해 이 땅에 순결한 신앙의 전통을 잇게 하신 하나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알리고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던 사람”이라며 “그가 없었더라면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과 정신은 상당 부분 잊혔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책에는 이외에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더욱 생각나는 주기철 목사와 주광조 장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과 미공개 사진들, 주요 연보 등이 담겨 있다. 파격적인 책표지에는 반대로 펼치면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전문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