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빈 무덤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사도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만이 아니라 부활에 대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를 하려고 힘을 다했다. 이는 그분의 부활이 그분의 메시아 되심의 가장 큰 증거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분의 부활이 선지자 요나의 표적임을 말씀하셨다(마 16:4). 요나의 표적보다 큰 표적이 없고, 예수의 부활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 되심의 증거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진다(롬 10:9). 만일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만 되시고 자신의 생명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생명을 드림이 만족스럽게 하나님에 의해 열납되셨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만일 우리의 죄 빚 때문에 갇히셔서 그대로 무덤에 머무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밖에 없다(고전 15:17).

안식(토요일)후 첫날(주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워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할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았다. 이는 그녀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상당히 일찍부터 서둘렀음을 증명한다. 단잠을 설치더라도,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일어나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말자! 그녀는 돌이 움직여지고 무덤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베드로와 또 한 제자에게 말했다(그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인데, 요한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표현했다). 그녀는 무덤을 방문하는 일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장 많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많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분의 죽으실 것을 알았고, 십자가까지 따라갔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무덤을 지켰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그들은 무덤은 비어 있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다. 요한은 무덤에 갈 때는 베드로보다 먼저 달렸지만, 막상 무덤에 가서는 구푸려 보기만 할 뿐 무덤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베드로는 비록 요한보다 늦게 도착했으나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았다. 들어가 보니 머리에 쌌던 수건(유대인의 장례법에 세마포로 싸고 머리는 따로 싸는 장례법)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음을 확인했다.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다른 제자는 요한 자신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몇 번씩이나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이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직 깨닫지도 못했다.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주님이 안 계시니 그냥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다 단념하고 말았다(매튜 헨리). 그들이 조금 더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더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이다. 그런데 무덤이 열리고 시체가 보이지 않자 제일 먼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해서 확인하게 했다. 무덤이 비어 있고 예수님이 안 보이시니 제자 둘은 집으로 돌아갔는데도, 이 마리아는 가지 않고 무덤 밖에서 울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마태복음에는 이 천사를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이 눈 같이 희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의 태도가 아주 놀랍다. 번쩍번쩍 빛나는 천사들이 나타났는데도 그녀는 동요가 없다.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천사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마음이 주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 돌아가신 주의 시체에만 관심이 있다. 그녀는 주님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부활하신 주 예수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 뒤에 서신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진정으로 찾는 자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신다. 그녀는 주 예수의 시신을 찾았지만 주님은 부활하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도 주님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심

주님의 질문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셨다. 부활하신 주 예수의 첫 번째 음성이다. 물론 사랑하는 자에게 동정과 위로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찾는 자들도 주님을 오해할 때가 있다. 그녀는 주님이 동산지기인줄 착각하였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이 마리아를 찾았다. 주님은 찾아야 할 사람이 많으셨을 것이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갔었고, 지금 무덤에 왔다가는 안 계시니 가버렸다. 요한도 정말 주님이 사랑한 제자이지만 그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가 버렸다. 주께서는 많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필요가 있으셨지만 누구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는가? 주님을 가장 사랑한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리아는 그저 울고 있었다. 마리아의 마음 속엔 예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한 천사가 나타나도 여전히 주님밖에 없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행동이 나오게 된다. 이 마리아는 행동이 달랐다. 요한은 마리아보다 사랑이 부족했다. 남자라 그런지 집으로 빨리 가버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갈 마음이 없었다. 주님 없는 이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에, 텅 빈 가슴을 채울 길 없었다. 그래서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울고 있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끝까지 주님 때문에 울고 있었던 이 여인에게 그래서 가장 먼저 나타나셨다.

주님의 사랑에 강권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모든 헌신이나 수고나 봉사는 ‘내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해봐야지, 십자가의 길을 가봐야지’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에 강권되어 기꺼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고후 5:14-15).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나는 여기서 여러분을 십자가로 이끌 뿐 아니라 그분의 차디찬 시체를 보게 해드리고 싶다. 그분이 누우셨던 무덤도 보여드리고,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비어 있는 무덤도 보여드리고 싶다. 주일 이른 새벽에 세마포와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을 개어놓으셨던 그 빈 무덤을 보여드리고 싶다. 여러분을 위해, 우리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고난의 인생을 사시고 십자가의 온갖 고초를 다 당하시고 죽으시고 차디찬 시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운반되어 무덤에 안장되셨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매장되시고 부활하신 모든 것을 분명하게 기록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되는 복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죽으셔야 했다. 그분이 죽으셔야 우리가 살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한 것은, 이 성경을 읽어볼 때 주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 하신 이 모든 얼마 동안의 일을 볼 때, 분명히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고, 다 이루시고 죽으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여러분에게 주님은 이제 주님의 길을 따라오라고 하신다. 왜 우리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부르시는가? 그것은 그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기 때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 주님의 사랑에 강권됨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활의 내재적 의미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막상 무엇을 믿는지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작 믿음에 있어서 상당히 모호하고 약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로마서 10장 9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즉 부활을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복음은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전했다. 그들은 많은 핍박과 환란 중에서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직접 눈으로 목도한 것들을 증거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다. 이처럼 믿고 믿지 않는 차이는 너무나 크기에 성도들은 믿음에 있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정죄를 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