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네 명의 여자가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함께 계셨다. 이는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언되었었다(눅 2:35) 마리아는 십자가의 광경을 다 목도하면서 마음이 칼에 찔리듯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들을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다. 그 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이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주님은 그러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누가 어머니를 일생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생명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주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고려하며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사셨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생명이다. 어떤 순간이 와도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며 다른 이를 위해서만 사신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 가족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부패한 것이다. 자기 가족만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너무나 혈육적이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찌른 사람들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자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사랑에 있다. 즉 사랑하지 않는 생은 진정한 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누구든지 사랑이 넓을수록 그 사람의 생이 넓은 것이다.’ 얼마나 넓은 인생을 사는가는 그가 얼마나 사람을 넓게 사랑하는가와 관계 있다. 자기만 사랑하며 사는 삶은 너무나 협착한 인생이다. 그래서 결국 부패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많은 사람에게로 사랑이 넓어질 때 그의 인생은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사랑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 사랑이 깊을수록 생이 깊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말들이 진실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남을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자신에서 벗어나는 순간, 남을 향해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철저하게 남을 위하시고 영혼들을 동정하고 사랑하신 분이다. 그분은 자신을 동정하고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는 분이 아니셨다. 텔리슨이라는 시인의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남들의 슬픔에 대하여 내가 깊이 생각해준 그곳에 나의 가장 좋은 날이 있었다”. 우리가 자신에게 빠지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텔리슨은 자기 인생의 가장 좋았던 날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깊이 생각했을 때, 자신을 잊어버렸을 때였다고 했다. 자아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은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도 했다. 세상 시인들도 이런 시를 쓰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 ‘내 자신’ 그리고 ‘내 가족’만을 위해 산다면 그런 인생은 아무 가치가 없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 바란다.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고, 정말 내 이웃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가족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진리에는 균형이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도 제자에게 어머님을 부탁하셨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고 했다. 마땅히 가족을 돌봐야 한다. 그렇지만 오직 가족만을 위한 삶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혈육적인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되는지 잘 배워야 한다. 혈육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영적 관계이다. 주님께서 ‘누가 내 모친인가, 누가 내 자매인가, 누가 내 형제인가?’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주안에 있는 성도들은 참으로 주님 안에서 생명으로 맺은 영적인 성도들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성경은 그분의 갈증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시편 22편 15절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69편 21절은 갈할 때에 신 포도주가 주어지리라는 것도 예언되어 있었다. 예수는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돌아가셨다. 공관복음에는 천지의 어두움과 더불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부르짖음이 있었다고 전한다(막 15:33-34).

가상칠언

주님은 오전 9시부터 6시간 가량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다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는 사람에게 핍박을 당하셨다. 그때는 밝은 대낮이었다. 그런데 정오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두움이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셨던 7가지 말씀이다. 주님의 7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어둠이 임하기 전 세 마디, 정오에 어둠이 임했을 때 한 마디, 그리고 어둠의 마지막에 하신 세 마디 말씀이다.

1. 어둠 전에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하셨던 첫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주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용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용서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에게 있어 제일 귀한 마음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다 연약하고 부족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 예수를 닮으려면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용서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잘못을 안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자신이 잘 느끼지 못할 뿐 그도 잘못한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용서를 많이 해야 한다.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다’라는 말은 모두 용서하지 않는 말들이다. 용서 다음에는 사랑이 흘러가야 한다.

주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이처럼 당신을 정말 힘들게 하고, 찌르고 못 박는 자들에 대해서 용서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여러분, 어떤 잘못도 용서하는 법을 배우겠는가? ‘내가 널 용서한다’고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은 용서를 잘하는데 자기보다 윗사람은 잘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 역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잘못해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어떤 사람은 잘못한 당사자가 자신에게 와서 용서를 빌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것이 진짜 용서이다. 오늘날 이방인 가운데서도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잘못을 빌어야 용서를 해준다는 말인가? 용서하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그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이다.

주님의 두 번째 말씀은 강도에게 한 말씀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 이 강도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 알았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구했다. 그때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주셨다. 주님은 악한 강도라도 회개할 때 그를 이끌어서 그분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시다.

세 번째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이다. 주님은 어떤 사람의 상황도 무시하지 않으신다. 이 땅에 계실 때도 여러 병자를 고치시고 불쌍한 사람을 다 돌보셨다. 그러므로 때로 여러분이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게 느끼실 때, 모친 마리아를 돌보시는 주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분은 모든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다 이해하시고 돌보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이 어머니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 걱정하고 돌보시듯, 여러분도 마리아 못지 않게 돌보신다. 그것이 주님의 성품이시다.

2. 어둠 중에

12시 정오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고 주님은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27:46, 막 15:34). 이것이 네 번째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이다. 주님은 그 순간 버림받는 느낌이셨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고 계셨다. 나와 여러분의 죄,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죄가 그 시간 다 예수님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예수를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이 땅에 어두움이 임하고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부어지는 찰나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우리의 구속주께서 인류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셨던 그 순간의 외침이었다. 우리의 죄가 그 시간 다 담당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고 귀하다. 아멘. 사랑하는 주님은 우리의 죄짐을 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3. 어둠의 마지막에

이후 두세 시간 이상 조용하다 세 시가 가까웠을 때, 주님은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말씀하셨다. 다섯 번째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킨 말씀인 점에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기적적으로 그런 모든 고통도 아무 문제 없이 견딜 수 있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고통을 다 느끼셨다. 몸에서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던 것이다.

다음 구절인 29절에는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사람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을 때는 받지 않으셨다. 쓸개 탄 포도주는 당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취제로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이기에 주님은 마시지 않으셨다. 그 모든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우리를 위해 친히 다 맛보셨다.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기 위해 그분이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

이제 6시간이 흐르고 운명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여섯 번째 말씀이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29-30절). 예수님은 이때 사람들이 드린 신 포도주는 받으셨다. 이는 시편 22편의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한 모금 목을 축이신 후 큰 소리로 외치시고 운명하셨다고 되어있을 뿐, 무슨 말씀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당시 십자가 가까이에 있었기에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23장 46절에 보면 마지막 말씀이 한 마디 더 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표하여 아버지께 부탁하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셨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 가운데서 건강한 사람들은 2, 3일을 견디는 사람도 있었다. 손과 발의 못 박힌 곳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기에, 금방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고난의 인생과 피곤한 인생을 사셨고 못 박히시기 전날 한숨도 못 주무셨고 채찍에 맞으셨다. 빌라도가 때려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했기에 아마도 다른 죄수들보다 더 심하게 맞으셨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그렇게 된 것이다.

주님은 심하게 맞으시고 밤새 끌려다니시고 또 십자가를 지고 그 언덕까지 올라가셨기에 오래 견디실 수 없으셨다. 그 여섯 시간도 주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이 하루 이틀 계시다 돌아가셨다면 그분이 운명하신 것을 아무도 확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지 않아도 이제 사람들은 예수의 시체를 두고 훔쳐갔다, 안 죽었다 하는 온갖 루머를 만들어 낼 것이기에, 죽음이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낮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님은 공개적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람은 요한 한 사람이 아니다.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가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했다. 성경에서 그들이 쓴 글을 읽어볼 때, 이들은 절대로 거짓말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도 사람들을 대할 때 누가 진솔하고 착한 사람인지, 거짓말하지 않을 사람인지 다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받으시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록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인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다.

다 이루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대로 우리 인류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오신 분이시다. 그분이 죽으신 것은 여러분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셨다.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 달려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죄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화목 제물이 되셨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가 되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어린 양 화목 제물로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사단의 노예로 팔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서 우리를 다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셨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죽음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멍에 아래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봐 주듯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대가를 치르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심판을 이미 받았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대리인이시다.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대표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우리와 관계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 한 분이 죽으셨는데도 모든 사람이 다 그분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고후 5:14).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대신에 그분을 심판했고 그분을 죽게 하셨는데도, 그 심판받은 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심판받는 것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믿으면 쉽게 봐주는 식으로 구원하신 줄 아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죄값은 반드시 다 치르게 하신다.

예를 들어 천둥 번개가 쏟아지는 날에 그것을 다 맞고 집에까지 갈 수가 없기에 어떤 집에 들어가서 피했다고 하자. 그 집에 있는 동안에 천둥 번개 소낙비가 다 지나가고 그치고 나면 우리는 하나도 맞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심판을 다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서 심판과 지옥과 형벌을 다 피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갔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단에게 이렇게 선포하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나의 죄 빚을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갚았기 때문에 너는 나한테 두 번 요구할 수 없다!” 여러분은 이렇게 수많은 목격자들 앞에서 외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속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모든 우리의 죄에 대한 빚을 거기서 다 갚으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렸다.

우리를 위해서 죄와 사탄과 율법 모든 것을 끝내시고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여러분은 ‘다 이루었다’ 하신 주님의 음성 한 마디를 기억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속죄의 문제, 구속의 문제, 화목의 문제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 말씀을 듣고 안심하고 기뻐하며 확신 가운데 평안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