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9: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십자가 형벌을 받는 죄인들은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주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고 기록한다. 잡히신 후 밤새 잠도 못 주무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 아침에 빌라도의 관정에서 채찍에 맞으셨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지고 가시려니 말할 수 없이 힘든 발걸음이었다. 가시다 쓰러지고 가시다 쓰려지고, 피 흘리며 한 발씩 한 발씩 걸어가셨다. 결국 로마 병정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데려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던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골고다까지 올라가셨다.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우리가 참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당시 사람들이 참으로 의롭고 아무 죄가 없는 한 사람을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아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죽게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은 그 절차가 다음과 같다. 먼저 죄인의 옷을 벗기고 십자가 나무에 등을 대고 눕혀 팔을 벌리게 하여, 손에 못을 박고 세로 형틀에 발을 못 박는다. 다음 십자가 끝부분을 땅에 대고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박고 세운다. 그리고 고난받는 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피를 조금씩 흘리면서 고통 가운데 죽게 하는 방식이다. 동맥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손발에서 피가 조금씩 흐르게 해 결국 숨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주 강인하고 원기왕성한 사람은 완전히 죽는 데까지 이삼 일이 걸리기도 했다. 어떤 경우 십자가로 갈 것도 없이 채찍질에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주 예수님은 오늘날 시간으로는 오전 아홉 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오후 세 시 운명하셨다. 여섯 시간 동안 매달리셨던 것이다. 극도의 고통으로 혈압이 오르고 열이 얼마나 심하게 오르는지, 시편 22편 15절에서는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고 묘사했다. 레위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을 번제·속죄제라고 했다. 완전히 태우는 것이다. 유월절 행사에서도 양을 ‘구워 먹으라’고 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렇게 완전히 구워지는 극한 고통이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은, 장대에 놋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기 위함이셨다. 성경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다.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주님이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주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혜택은 결국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아서 우리의 건강도 치료됐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킨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전혀 죄가 없으시며 죽지 않을 능력과 권세도 있으신 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이셨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도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은 순교의 죽음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힘이 없어 돌아가신 것도 아니시다. 여러분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피 흘리셨던 것이다. 요한일서 4장 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어떻게 아는가? 십자가를 볼 때 알게 된다. 그분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살리려 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우리를 살리려고 그분이 죽으셨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시며, 땅에서 들리는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그분께로 이끄는 방법이다. 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돈을 좀 주는 것도 소용 없다. 가장 확실하게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는 길은 죽는 것이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생각할 때, 아무리 강퍅하고 완고한 사람이라도 그분께 마음이 향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요한복음 19장을 읽을 때마다 ‘주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라는 마음이 든다. 주님께서 땅에서 들리심으로, 지금까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갔다. 주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시는 방식은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것이 주님이 돌아가신 이유이다. 사람들이 공허하고 무익하게 살지 않도록 삶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마태는 이 패를 죄패(아이티아, 헬)라 칭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가 못박히신 것을 공표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부착시키라고 명한 것이다(19절). 그 내용은 ‘나사렛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었다. 물론 이 패를 붙인 것은 예수를 모욕하기 위함이었다. 그 죄패는 그렇게 해서 붙였지만, 그대로면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실 아무 근거가 없음을 확실시한 것이다. 그분은 실상 유대인의 왕이시다. 그 사실이 왜 십자가에 못박히실 이유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패가 십자가 위에 붙게 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 패를 읽었다(20절). 이 비문은 세 나라(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 언어로 기록되었으므로 당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그 패의 글을 고쳐 달라고 주문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 하고 그들의 말을 묵살했다.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됨

그들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전 그의 옷을 벗겼다. 벌거벗음의 수치는 아담이 죄를 범한 후부터 인류에게 도달하였다. 그리스도는 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당할 수치를 담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을 믿는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롬10:11).

고대의 대부분 나라에서 처형되는 사람들의 옷은 형 집행인들의 소유가 됐다고 한다. 당시에 백부장과 네 명의 로마 군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집행을 맡았던 것 같다. 당시 주님의 겉옷은 네 깃이기 때문에 네 사람이 나눠 자기들 소유로 하나씩 취했지만, 속옷은 위에서 아래로 통으로 짠 것이라 나눌 수 없었기에 누가 가질 것인지 제비를 뽑았다. 시편 22편 18절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는 예언은 주님이 이 일을 당하시기 7-8백 년 전인 다윗 때로부터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24절에 요한이 기록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면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게 세부 사항까지 예언돼 있는데, 예언된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8절에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도 시편에 이미 예언돼 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 이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님이 목마르다 하실 때(갈할 때) 사람들은 그분에게 신포도주를 주었다(초로 마시웠으니).

34절에서는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고 했는데, 이 말씀도 스가랴 12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았다고 했고,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 53장 5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찔림에 대해서 분명히 예언했다. 또 시편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했듯이 두 강도는 다리를 꺾였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군병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이 모든 내용이 구약 성경에 그대로 세세하게 예언되었고 여기서 실제로 다 이루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주님께 이런 일을 했지만 이것은 다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신 주님

군병들은 예수님을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였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탈취해 감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탈취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행하신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은,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며 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고통 당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없으셨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신 산상수훈 말씀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고소해서 너희의 속옷을 빼앗으려 하면 그 속옷을 줄 뿐 아니라 달라고 하지 않은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탈취당하시는 이러한 순간에 어떤 원망도 없으셨다.

내게도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여겨지는 경험이 있었다. ‘정말 다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너무나 분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할 수 있는가 생각하니 도무지 용서가 안 되고 사랑은 더구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주님이 그런 마음을 물리치고 녹여주시며 그들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주님은 그러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주님만 그렇게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을 따라서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을 동정하지 않으셨다. 그 고통 속에서도 영혼들을 위하셨다. 첫째로는 무지함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의 죄를 용서하시라고 아버지께 기도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강도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강도를 구원하게 하셨으며 ‘오늘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해 주셨다. 강도를 위하시고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