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1805-1875)을 만나다

언젠가 나는 “세 평 서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글에서  내 문학적 욕심의 최초 동기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은 동해시로 행정구역이 바뀌었지만, 나는 강원도 삼척군 북평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라 전체가 어둡고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수필의 일부를 인용한다.

그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교실 옆에는 나무로 엉성하게 벽을 만들어 놓은 작은 가건물 하나가 있었는데, 방 하나는 학교의 창고로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교과서가 보관되는 곳이었다. 서가는 바로 교과서를 보관하는 방을 칸막이하여 만들어 놓은 세 평 남짓한 공간이다. 그 서가가 공식적인 도서실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세 벽면에 대여섯 줄씩 선반을 만들어 책을 꽂을 수 있도록 하였고, 선반마다 어린이용 도서들이 가득했다는 것만 생각이 난다.

내가 그 서가에 처음 들어간 것은 담임교사의 심부름 때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작은 열쇠를 주시면서 교실 벽 쪽의 선반에 있는 교사용 전과지도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많은 책들이 있는 작은 방의 분위기가 무척 신기했다. 서가의 책들은 대부분 기증을 받은 헌 책들이어서, 어떤 것들은 표지가 떨어져나가 책의 제목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교실 벽에 기대어 짜 넣은 선반에는 유독 깨끗한 책들만 꽂혀 있었다. 탐나는 예쁜 그림들이 있는 만화책과 동화책, 그리고 전학년용 새 교과서가 있었고, 전과 지도서라고 하는 교사용 도서가 있었다. 나는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며 서고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호기심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바로 전과 옆에서 그날 내가 만난 책이 안데르센의 동화집이었다. 안데르센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던 때였지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는 그의 긴 이름이 참 매력 있었다. 좁고 어두운 서가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리듬에 실어 발음하면서 여러 번 반복해 보았다. ‘한~스’ 하고 한음 올린 후 ‘크리스티~안’, 다음에 ‘안데르센’은 두 박자쯤 끌면서 반 박자 빠르게 불러보았다. 그 소리들이 얼마나 음악적이었던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외국문학을 공부하게 되고 세계문학기행을 시작했을 때, 안데르센의 고향 마을을 찾아가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읽은 책은 안데르센의 연작 단편 ‘그림 없는 그림책’이었는데, 처음으로 접한 그 그림 없는 그림책 속에는 작품의 제목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많은 그림들이 있었다.

정말로 많고 다양한 얼굴들에게 여린 나의 감성이 어떻게 반응을 하였는지…. 나는 안데르센의 문학 기행을 시작하면서 그 때의 충격을 새롭게 되살렸다. 또 맡은 직책으로 인하여 여러 번 덴마크를 방문하였을 때도 어린 시절 불과 세 평 남짓한 그 서가에서 만난 안데르센은 여전히 나의 감성을 흔들었다. 안데르센 작품의 모든 무대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많은 얼굴들로 가득하였다. 나는 두렵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손을 내어 밀었고, 일일이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작품들을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란 제목으로 첫 집을 출간한다. 그런데 ‘얼굴 없는 그림책’과 함께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인어공주, 굴뚝 청소부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이 어른들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냥 <동화책>으로 제목을 바꾼다.

그러하니 안데르센 작품의 무대는 어른인 나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의 모든 어른들을 그 무대로 초대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창조 세계의 경이로움과 창조주를 닮은 인간 내면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그의 고향 하늘 아래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당신도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보물찾기를 하듯 작품의 무대에 서 보라. 수레국화처럼 파아란 하늘로 어린 시절이 되돌아온 듯하리라. 일생 동안 30여회나 지구를 떠돌아다녔던 안데르센의 문학적 열정이 당신의 것임을 확인하면서 전율할 것이다. 나의 문학기행은 이렇게 안데르센의 고향 마을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