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역사적 예수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그의 이름으로 집행하는 성례전(sacrament) 가운데 임재하신다. 성례전은 하나의 종교의식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도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예수는 세례 가운데 임재하신다. 예수는 세계 선교의 지상명령과 함께 결신자에게 세례 베풀기를 명령하시고 그 가운데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예수는 그가 제정하신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신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예수께서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므로, 이 기념 속에 주님은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성만찬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구속의 사건을 가시화시킨다. 성찬에 참예하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은 현재화한다.

1. 세례 의식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세례는 물이라는 물질을 은혜의 매개로 사용한다. 물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직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세자의 이마나 머리에 뿌릴 때 그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하는 거룩한 상징의 기능을 한다. 세례식에 뿌려진 물은 단지 물질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영적인 기능을 한다. 이것은 성례전이 가진 신비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세례를 정의하였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세례 시에 뿌리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는 표를 나타낸다. 물 자체는 우리의 죄를 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제하여진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린 속량으로 우리의 죄가 속하여진다. 세례는 어둠 속에 있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표다. 이 세례식 가운데 그리스도는 임재하신다. 이러한 성례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는 우리 가운데 그의 언약의 표시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의 임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자의 마음 속에 감지된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사건이다.

2.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신다. 그의 임재는 그가 제정하신 떡과 포도주 가운데서 일어난다. 이것은 신비로운 은혜의 사건이다. 승천 후 그분은 가시적 역사(visible history)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비가시적인 역사(invisible history)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가시적 역사란 일반 시간·공간적 세상의 역사이며, 비가시적 역사란 복음 전파의 역사이자 선교와 교회의 역사를 말한다. 역사적 예수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성령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시고 현재하신다. 역사적 예수는 가시적 역사 속에서는 비가시적으로 은밀하게 일하시나, 비가시적 역사 속에서는 가시적으로 현재적으로 일하신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는 6.25 전쟁 발발, 유엔군 참전과 3년 후 휴전과 한국·북한·미국에서 거행된 종전 60주년 기념 행사에는 은밀하게 일하시나, 종전 60주년에 맞이하여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기념하는 신자들의 기도와 회중 예배에는 은혜의 성령으로 명시적으로(선포의 말씀과 성도의 교제) 일하신다.

1) 생명의 떡과 피: 속죄의 제물

(1) 요한복음의 증거

요한복음에서 지상적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에 관하여 설교하시면서 그가 십자가에서 드리실 속죄 제물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8-51). 이 말씀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어 5천 명을 베불리 먹게 하신 후 다시 자기를 따라온 민중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 육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는 말인 줄로 생각하고 서로 쟁론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이에 예수는 자신을 인자로 지칭하면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생명이 있다”는 영적 교훈을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는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최후의 심판에 부활할 것이니 “나는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그리고 예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예수께서 계시고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예수로 말미암아 영생한다고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6-57). 이 말씀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며,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고 있다. 신비적 연합이란 예수께서 성만찬을 통해서 신자들 마음 속에 임재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에 대하여 가롯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 말씀이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고 반응하였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의 말씀이 물리적 생명(bios)이 아니라 영적 생명(zoe)에 관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물리적 생명이란 떡과 포도주에 의존하는 생명이나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의존하는 생명이다.

(2) 요한 서신의 증거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역사적 예수가 이제는 우리를 위한 대언자·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시고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역사적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는 그가 우리의 속제를 위한 화목제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의 속죄제물 되심에 대하여,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령은 증언하신다는 신령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 8). 물이란 예수의 세례 받으심이요, 피로 임하심이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말한다. 예수의 세례와 십자가에 죽으심을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물과 피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대속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셋이라고 말한다.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의 진리를 가리킨다. 물은 인간 되신 예수의 세례요, 피란 대속제물이 되신 예수의 희생이요, 성령은 물과 피가 물리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요 물이 되신다. 사도 요한은 증거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3) 바울의 증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성만찬의 역사적 전례(典禮)를 설명해준다. 바울은 자기가 교회에 전하는 것은 주 예수로부터 받은 것(고전 11:23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3하-25). 떡과 피는 새 언약이다.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는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구속의 새 언약을 세우셨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으로 세워진 옛 언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새 언약이다. 성만찬은 기념이다.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기념이다. 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재림하실 때 까지 기념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믿음을 마실 때마다 역사적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우리는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교통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만찬은 기념인 동시에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칼빈은 성만찬을 통한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을 말했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마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게 된다. 이 때의 살은 물리적 살이 아니라 신령한 양식이요, 이 때의 피는 물리적 피가 아니라 신령한 음료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 속에서 역사적 예수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신자에게 현재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만찬에 임하는 신자들의 경건한 태도와 성화적인 삶에 관하여 권면한다. 신자들은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고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누구든지 자기의 삶을 잘 살피고 자기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여겨질 때 이 성만찬에 참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의 몸을 훼손하게 하며 자기의 죄를 먹고 마는 것이 된다고 경고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8-29).
 
3. 가시적 말씀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를 통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주님의 영적 임재를 경험하는 기념이다. 역사적 예수는 이 성만찬에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중세의 천주교는 화체설을 주장하였다. 신부(神父)가 “이것은 예수의 몸이다. 이것은 예수의 피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는 실체적인 예수의 몸과 피로 변환된다(transsubstantiation)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술적인 성격이 짙다. 이에 반하여 종교개혁자 루터는 화체설을 조금 누그러뜨려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떡과 피는 그대로 실체적으로 물질로 남아 있으나, 영적으로 편재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 물질에 함께 있다(consusstantiation)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떡이나 포도주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며, 그것은 역사적 예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rememberance)이라고 상징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으나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spiritual presence)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는 성만찬을 중요시한다. 여기에는 성육신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비록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그의 아들 성자의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성만찬의 가시적인 떡과 포도주 제정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그의 대속의 사건을 다시 한 번 가시적으로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십자가의 케리그마가 보이지 않는 선포의 사건이라며, 성만찬 의식은 비가시적인 선포를 누구에게나 가시적으로 만드는 영적 사건이다. 이 영적 사건은 결단코 물질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죄악시하는 것이 영지주의인데, 하나님의 신은 물질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결단코 물질을 악한 것으로 배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물질을 그의 창조의 선함의 표현으로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실 뿐 아니라 떡과 포도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이것이 성만찬의 신비다. 성만찬 신비의 극치는 태초에 말씀이신 그가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하나님의 낮아지심(kenosis of God)을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미 역사적 예수는 지상적 사역 시에 앞으로 될 일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회상의 영이시며,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시키며, 역사적 예수의 대속의 사건을 믿는 자에게 적용시키는 영이시다.

맺음말

성례전은 단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상징적으로 표식하고 있는 실재,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가 지난 이천 년 전의 종교적 인물이나 교주(敎主)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믿고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들에게 현재 죄를 사하시는 주, 현재 그의 제물 되신 살과 피를 통해서 살아있는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1985년 설립된 미국 캘리포니아의 웨스타 연구소(Westar Institute)에서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등이 주도해 근 20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역사적 예수 세미나’에서 재구성한 예수는, “모든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지혜자이며 굳은 관습에 도전한 사회비평가” 내지 “겸손한 갈릴리의 현인”이었다. 이러한 예수상은 전혀 성경이 알려주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며, 성만찬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세미나에서 연구나 토론을 통하여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대로 세례식에서 겸손하게 무릎꿇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 예식에서 그 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분과 신비로운 연합을 체험하는 곳에 다가오시는, 살아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