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한 권의 책이 준 빛에 대한 감동을 말하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밀턴보다 앞서 살았던, 위대한 크리스천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의 말이다.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많은 것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인 것을.” 이 말은 그의 <신곡> 천국편에 나온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단테 알리기에리는 르네상스가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만큼, 중세와 근세의 분수령을 이루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내가 단테를 만나기 위하여 그가 태어나서 자란 아름다운 아르노강변의 도시 피렌체를 찾아갔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오늘 내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떠나온 길에서 단테의 말을 상기하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내가 받은 한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선물은 ‘즐거운 독서산책’이라는 제목의 독서파일 두 개인데, 모두 300페이지 분량이다. 이 파일은 남편과 동료이신 경북대 명예교수요 지묘교회 장로님인 김봉환 교수께서 보내준 것이다.

이 선물 파일은 2010년과 2011년에 교수님께서 읽은 책들에 대해 줄거리를 요약하고 멘트를 붙여 정리한 것인데, 2010년도 파일에는 모두 125권이 2011년에는 109권이 정리 요약돼 있었다. 오늘 서두에 인용한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많은 것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인 것을(, 바로 이 구절이 2011년 독서산책 파일 표지에 기록돼 있었다. 독서에 대한 단테의 이 명언을 멘토로 지니고 있는 나이기에, 선물 파일을 여는 순간 감동이 더 컸던 것이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책을 110권 이상 읽을 수 있다는 것, 상상이 되나. 나는 학기가 시작되면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그 해 문광부에서 선정한 필독서 목록표를 나누어 준다. 그 가운데 자신이 읽은 책을 체크하도록 하고, 몇몇 학생에게 줄거리와 의견을 이야기할 기회를 준다. 놀라운 것은 수십 권의 필독서 가운데 단 한 권의 책도 읽은 적이 없는 학생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해의 필독서 중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읽어 본 책이 있는지 물으면 10권을 넘지 않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한 사람의 1년 독서량은 1.3권, 즉 두 권이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책값으로 지불하는 금액은 9천9백원으로 나와 있다. 나는 지금 이 자료가 신뢰할 만하다든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1년에 100권 이상의 책을 읽고 감상을 겸하여 정리하여 파일을 만들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해준 김봉환 장로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 파일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명색이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듣고 보지도 못한 책들이, 너무나 많이 자리를 잡고 서서 나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파일 속에 있는 목록을 일일이 살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을 표시하였다. 참으로 충격적이었고 또 너무나 부끄러웠다. 김 교수께서 2010년에 130여권을, 그리고 2011년에 120권 정도를 읽으셨으니 전 생애를 통한 그분의 독서량은 얼마나 대단한가.

독서의 분량보다, 그가 읽은 모든 책들이 그 분의 생애에서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 나는 문학적으로 상상이 갔다. 그 책들이 어떻게 그분의 생애에서 하늘을 향해 열린 창이 되었으며, 세계를 품은 가슴에 빛이 되고 길이 되었는지…. 그 사실이 나를 전율케 하였다.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한 권의 책으로 그분의 영혼에 닿아 씨로 뿌려지고 열매로 거두어져 얼마나 많은 학생들과 후배들, 지인들을 격려하였을까. 지금 나에게처럼 도전과 용기를 주었을까. 그분의 삶 속에 녹아든 세계의 귀중한 자산들을 상상해 보면서 나는 큰 도전을 받았다.

내가 받은 그 선물, 독서파일 속에는 우리 시대 위대한 영성학자이며 크리스천 작가인 헨리 나우웬의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도 있었다. 스펄전 목사님의 ‘응답이 보장된 기도’도 있었다. 장로님이신 그분의 도서목록에는 법륜 스님의 ‘주례사’도 있고, 불교TV에서 소개되었던 ‘날마다 웃는 집’도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박완서 선생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저서도 있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우리 삶의 은총이다. 좋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남으로써 내가 당장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꽃향기처럼, 바람처럼 우리 곁에 머물면서 공기처럼 영향을 미친다.

어디 그뿐인가. 그 책 속의 한 구절로 우리의 인생이 바뀌지 않던가. 내가 밀턴을 만났을 때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경험을 나누고 있는지.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낙원을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