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은 그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호칭, “인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은 “나는 …이다”(ego eimi)라는 일인칭 어법에서도 드러난다. 이 어법은 요한복음에서 주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알렸다.

그는 자신이 “생명의 떡”(요 6;35), “세상의 빛”(요 8;12),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 “부활과 생명”(요 11;25),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 “포도나무”(요 15;1)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그리고 하나님이심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그의 증언은 부활 이전의 사역에서는 메시아 비밀 속에 있었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 빛을 드러내었다. 나사렛 예수는 부활 이후에 하나님으로 호칭되고 명료히 인정되었다.

I. 예수 자신의 증언, “나는 …이다” 어법

1)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 어법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ego eimi) 어법은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야훼의 자기 선언에 상응한다. 예수는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을 증거하였다. 예수는 생존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양의 문이라 …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 예수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예수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는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의 이러한 비유를 통한 “나는 …이다”(I am, ego eimi)라는 자기 지칭은 단순한 비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설명을 통하여 자신과 비유를 청취하는 자들의 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로 만들고 있다. 생명의 떡이란 “세상 사람이 주리지 않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하는 떡”이다. 생명의 떡은 세상 사람을 주리지 않게 함으로 세상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한다. “세상의 빛”이란 그를 믿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는 “생명의 빛”이다. 세상의 빛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빛이 되는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한다.

“양의 문”은 “그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 문”이다. 양의 문은 그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는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 “부활과 생명”은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영생을 얻도록 하는 존재”, “길과 진리와 생명”은 “참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유일한 존재”, “참 포도나무”는 그 속에서 신자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존재”를 나타낸다. 부활, 생명, 길, 진리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부활, 영생, 길, 진리가 되는 인격적 관계를 제시한다. 참 포도나무도 그를 믿는 자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게하는 인격적 관계를 드러낸다. 예수는 비유를 통한 자기 설명을 통해서 자신이 유일한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2) 구약의 “나는 …이다” 어법

“나는 …이다”를 뜻하는 희랍어 “에고 에이미”(ego eimi)어법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야훼 이름과 이사야서 등에서 반복되는 “나는 …이다“라는 절대형의 어법에 연관된다(Gutherie, 『신약신학』, 380). 이 어법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시면서 “나는 …이다”에 특별히 신적 의미를 부여하신다.

“스스로 있는 자”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누구에 의하여 출생되거나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세상 만물이 생기기 전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나의 존재의 선험적 근거로서 항상 설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 존재의 선험적(先驗的) 근거로 항상 설정되어 있다. 내가 나의 눈망울을 보지 못하고 그 눈망울을 통하여 나 자신과 이 세상을 보듯이, 하나님의 존재는 나와 세상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가 되신다.  그러한 하나님만이 자기를 소개하실  때 ”나는 …이다“라는 어법을 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나는 …이다” 어법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5),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사 51:15),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사 60:16) 등등.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로 드러내신다.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으며, 다른 영들이나 신들이 있을지라도 이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 전능자시다. 하나님은 만유를 지배하시는 보편적 신이시다. 창조주로서 그는 보편적 영으로서 모든 종교와 신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사야 등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은 특별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구속의 섭리를 그가 선택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주적 하나님, 보편적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특별한 구원의 하나님을 구별해야 한다. 오늘날 WCC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호켄다익(J. C. Hoekendijk)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에서는 보편적인 우주적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구원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이 혼동되고 있으며 교회의 선교가 무시되고 있다(이동주, “WCC와 개종의 영성” 제19회 기독교학술원 영성 포럼, “WCC 영성과 한국교회”, 2013년 5월 3일 자료집, 35-47).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 어법은 역사적 예수를 구약의 야훼로 지칭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하나님 은혜의 분배자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역사적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심지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부활절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함축적이며 잠재적인 메시아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다가, 그가 부활한 후에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하여 그렇게 설교되고 전파되고 호칭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라는 미련함과 약함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세히나(schehina)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겸허함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다.

3) 요한계시록 “에고 에이미” 용법의 특징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 어법은 요한계시록에서 명료히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는 사도 요한을 통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시 되고 있다. 계시록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계 1:8상)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시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의 다른 구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등도 마찬가지다. 여기 나오는 “에고 에이미”어법에서 역사적 예수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4) 요한계시록에서 역사적 예수의 호칭

요한계시록에서 나사렛 예수는 더 이상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계 1:1)시요, “하나님”, “주 하나님”(계 1:8상)으로 호칭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서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칭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는 직접 계시를 통해서 소아시아 교회를 향하여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치 올 자요, 전능한 자”로서 소개하고 계신다. 여기서 예수는 “주 하나님”으로 호칭되고 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예수는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지칭하신다. 그리고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예수는 스스로를 다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 지칭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예수는 스스로를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지칭하신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계 22;16).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나오는 이 명제는 나사렛 예수가 다윗왕의 뿌리인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혈통을 지니고 역사적으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이는 영원 전에 계신 성자 하나님, 역사 속에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 예수 안에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구약에서 약속되고 신약에서 성취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II. 요한의 증거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말씀으로 호칭하고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은 예수를 “독생하신 하나님”(monogenes theos)이라고 호칭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부활하신 예수는 자기를 보지 못한 도마가 그의 부활하심을 의심하자, 도마에게 나타나 이르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인격적으로 대면하면서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Ό Κύριός μου και ó θεός, 요 20;28). 이 도마의 신앙고백에서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 비밀이라는 부활 이전의 메시아적 증거를 드러내는 많은 베일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본래적 정체성인 하나님(ó θεός)에 도달한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메시아 비밀이라는 베일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의 자취를 “어린 양” 칭호로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어린 양으로서 “보좌에 앉으신 이”, “성부 하나님”과 동격으로 경배되고 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구별되지 않은 채 경배와 찬양이 드려지고 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계 5:13).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 여기서 명백히 역사적 예수, 어린 양은 하나님과 동격시 되고 있다.

III. 바울의 증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유대인의 후손이나 신성으로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

바울은 디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칭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동격으로 부르고 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딛 1:4). 바울은 이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이 두 축도에서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칭호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살전 3:11).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동격 설정과 기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성자 하나님으로 지칭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IV.  베드로의 증거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바울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1-2). 여기서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격으로 호칭되고 있다.

V. 히브리서의 증거

히브리서 저자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며 만유의 후사요 창조자로 지칭하고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체의 형상”이다. 그는 창조자요 죄의 대속자이며,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는 분명히 성자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 아들에 관하여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니이다”(히 1:8).

저자는 구약 시편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의 하나님을 아들과 연관시키는 것은 아들이 구약의 약속이 실현된 메시아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이 말하는 것처럼 구속사적 약속이 구약에서 시작하여 신약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맺음말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성자 하나님: 니케아 칼게돈 신경 전통에서 벗어나는 바아르 선언(1990년)의 기독론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두가지 언급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마태는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체성을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그러나 동시에 위로부터 오는 정체성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며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특징지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마가는 그의 복음서 시작에 있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누가는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에 관하여 사실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영원 전 존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리고 바울서신과 요한 서신과 계시록은 이 역사적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복음서 저자들은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하여 메시아 비밀을 거치면서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그가 승천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성자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WCC 선교문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이중성을 지니고 애매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9년 산 안토니오 선언(San Antonio Statement)이 그 증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구원의 길도 증거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 어떠한 제한도 둘 수 없다. 이 두 가지 확언 사이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베리타스, “금주섭 WCC 전도위원회 총무, “종교다원주의 논란 반박, ‘종교간 대화’, ‘종교다원주의’로 여기는 것 편협한 이해” 김진한 기자, 2013-05-04 16:57).

이 긴장이란 한 편으로는 우주의 영으로서의 보편적 역사와 다른 종교에도 존재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모습과, 다른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과 기독교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이형기, “WCC신앙과 신학이 추구하는 ‘종교  간 대화의 영성,“ 제19회 기독교학술원 영성 포럼, “WCC 영성과 한국교회”, 2013년 5월 3일 자료집, 9-28).

그런데 1990년 바아르 선언(Baar Statement) 이후의 WCC 운동의 그리스도상은 교회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모습보다는 보편사와 타종교에서도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강조하는 패러다임의 변천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선교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수용함으로써 복음 선교의 종언을 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필자. “개회사” 제19회 기독교학술원 영성 포럼, “WCC 영성과 한국교회”, 2013년 5월 3일 자료집, 6 참조).

사도적 교회, 니케아와 칼게돈 신경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전통교회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 외에 다른 그리스도, 타종교나 다른 계시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