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나사렛 예수에 대한 로고스(ό λόϒος, the logos) 칭호는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로고스 개념으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the Word)이란 헬라어 로고스(ho logos)의 번역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다. 사도 요한은 이 로고스가 바로 태초에 계신 예수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 용어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의 신적 지위를 확언하고 그가 창조, 즉 시간 이전에 영원에서 선재(先在)하였음을 증언한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 예수는 성육신하신 로고스요, 인간이 되신 말씀으로 증언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로고스 용어는 초대교회에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스토아 철학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사용하였다. 필자는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 용어가 스토아 철학과 필로의 사용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면서 신구약에 사용된 독특한 의미를 살피보기로 한다.

1. 말씀

1. 헬레니즘의 로고스 사상과 차이
1) 스토아 철학과의 차이

스토아 학파 사람들(the stoics)은 모든 물질(all matters)이 뜨거운 증기(a fiery vapor)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프뉴마(pneuma)에 의하여 물질이 생산되었고, 이에 의하여 세상은 결국 소멸될 것으로 보았다. 우주의 형성과 파멸 사이의 기간 동안 모든 물질과 생명이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이 창조력을 로고스(λόϒος)라고 불렀다. 이 로고스는 창조적이고 심리적이지만 인격적이거나 자의식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로고스가 인간 삶을 결정하며, 로고스의 결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스토아의 윤리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 개념이 스토아 사상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David F. Wells, The Person of Christ, 1984, 이승구 역, <기독론> 엠마오, 1994, 145). 요한의 로고스 개념은 물질이 지닌 창조력이 아니라 영적 창조력이며, 인격성과 자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도 요한은 로고스를 역사적 인물 나사렛 예수의 선재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10).

2) 유대교의 필로의 사상과 차이

요한의 로고스 사상은 유대교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 B.C. 20-A.D.50)의 로고스 사상과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다르다. 필로는 플라톤적 신(神) 개념과 유대적 하나님(엘로힘, elohim) 개념을 결합하였다.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신의 온전하고 깨어지지 않는 초월성 개념과 세상과의 비연속성 개념을 이끌어낸다. 신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의 범위 밖에 있어서 미와 덕에 대한 인간의 최고 개념과 같지 않다. 플라톤이 말하는 신의 초월은 가변적인 세상과의 거대한 간격을 만들어 내어 중보자(a mediator)가 필요하게 된다. 필로는 유대교로부터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세계 내의 섭리적 통치자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이 로고스 사상이다.

필로에 의하면 로고스는 하나님 정신 안에 하나님의 생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로고스는 인간의 생각처럼 말(words)로 표현된다. 이 말의 새로운 형태인 로고스는 창조와 섭리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또한 세상과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연결시킨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중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로의 로고스 개념은 요한의 로고스 개념과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3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David F. Wells, The Person of Christ, 146-7).

첫째, 필로의 로고스는 신적이지도 선재적이지도 않다. 필로는 논한다. “그 어떤 죽을 수밖에 없는 것도 우주의 지고한 아버지와 유사하게(in the similitude) 피조될 수 없고, 오직 지고한 존재의 말씀이신 둘째 신(the secondly deity)의 형태에 따라서만 제조되는 것이다.”(Philos Judaeus, The Works of Philos. The Contemporary Josephus, Vol. IV, C. D. Yonge, tras. 4. vols., London, 1855, 391.) 필로의 로고스는 신과 세상의 중개자일 뿐이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신적 존재이며 선재적이다. 그는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둘째, 필로의 로고스는 인격적이지 않다. 그것은 말하는 자의 생각과 의도의 표현이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인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인격적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물의 인격적인 창조자이다.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며, 창조자로서 만물의 창조를 기뻐하셨다.

셋째, 필로의 로고스는 지고한 존재의 자기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주 안의 합리적 질서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양상(patterns)과 동일시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스스로 성육신하신 로고스이다. 요한의 로고스는 필로의 로고스처럼 우주의 합리적 질서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 속에서 나오신 분으로 독생하신 하나님, 즉 성자(the Son)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따라서 요한의 로고스 개념과 필로의 로고스 개념은 의존의 관계보다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난다(David F. Wells, The Person of Christ, 147). 영국의 신학자 맥킨토시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피력한다. “제4복음서 기자는 필로의 용어를 사용해 필로의 사상을 부정하고 있다.”(MacKintosh, The Doctrine of Jesus Christ, 116)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로고스, 즉 창조의 말씀은 탈쿰의 메므라(The Memra of the Targum, Logos of the Aramaic OT, 말씀 교리)에서 나타나는 사변적인 색채가 전혀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로고스는 윤리적이며 인격적 존재이며 구원론적인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관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0-13). 요한이 증거하는 로고스는 우주적 원리로서 있는 사변적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육체를 지닌 로고스다. 이러한 요한의 로고스는 필로의 로고스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II. 구약의 로고스 사상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요한복음의 로고스 개념의 원천을 오히려 구약의 로고스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구약에서 우리는 로고스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로고스는 말씀과 동일시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격적인 성격을 자니고 있다.

1. 말씀으로 창조

창세기에서 사용되는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다.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과 만상이 지음을 받았다고 노래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시편 기자는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노래한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 148:5).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땅에 보내어 눈을 내리시며 서리를 날리시며, 우박을 뿌리시고, 추위를 보내시고, 봄이 오게 하시고 바람과 물이 흐르게 하시고 다른 민족 아닌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의 율법을 주셨다고 노래한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 147:15-20)

2. 말씀으로 하시는 계시와 연관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시어 대홍수가 끝남을 알리시고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시고 노아 가족에게 생육과 번성의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창 8:15-17).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구속사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가운데 걱정하는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시어 위로와 복을 주시는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요 그와 언약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창 17:1-2).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 말씀은 우리 길의 빛

하나님 말씀은 신자들의 삶의 길과 규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청년이 그의 행실을 주의 말씀이 주시는 지침에 따라 행하여야 할 것을 노래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시편 저자는 주의 말씀이 영혼을 소성케 하실 것을 기도드린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5). 주의 말씀은 기도자에게 영혼을 소성케 하고 소망을 준다고 노래한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시 119:49). 주의 말씀은 곤란 가운데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 119:50).

4. 말씀의 인격화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에 미치는 계절의 변화와 기후의 변화를 이끄는 이치로도 작용한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5-18).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 대해서는 단지 무시간적으로 주어지는 율법이나 규례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 말씀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

하나님은 어려움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말씀을 보내시어 저들을 구원하신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이 말씀을 다른 민족아닌 야곱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주셨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 147:19-20).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는 초대교회와 그리스도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의 말씀으로 주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세계 선교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가르침을 받는 모든 자들에게 영혼과 심부(心府)의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며, 그 영혼을 소성케 하는 성결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5.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천지의 규례도 창조가 지속하는 한 변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시 119:89-91). 예수님은 인간에게 주신 율법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신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영광은 풀의 꽃 같아서 시들고 떨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된다.

II. 신약의 말씀, 성육신 하신 말씀

1. 태초의 로고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한다. 말씀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나사렛 예수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상).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증언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2. 창조자 로고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창조의 로고스임을 증언한다. 모든 만물이 그의 창조 로고스에 의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만물이 그 없이는 된 것이 없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후사”요 “창조자”라고 증언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의 창조자”요 “만물이 그 안에서 함께 서는” “만물의 으뜸”이라고 증언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6-18). 역사적 인물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창조자 로고스이다. 예수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자이며, 만물의 창조이시며,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만물의 으뜸이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는 이유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 아들이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빛으로서의 하나님 계시

말씀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요 1:1하). 말씀 자체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란 사람들의 빛이다. 각 사람들에게 비치는 진리의 빛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4-9). 예수는 빛으로서 하나님의 본체를 우리들에게 드러내는 계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본체인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예수의 모습 속에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 자신이 형상화 되었다. 나사렛 예수는 빛이시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4. 생명

말씀은 하나님이시므로 영원하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하). 문법적으로 “이시니라”라는 미완료(ήν)가 사용되었다. 이는 말씀이 지속적인 무시간적 존재(the continuous timeless being)임을 시사한다(J. H. Bernard, A Critical and Ex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1. 2 vols.(Edinburgh, 1926), 2).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그 자체가 생명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예수는 자신이 유일한 생명임을 증거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여기서 나사렛 예수는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시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메트는 하나의 길,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일한 길과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시다.

맺음말

나사렛 예수는 태초의 로고스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성장하시고, 갈릴리에서 복음 사역을 하신 역사적 인격이시다. 그의 신비성은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나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은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지식이요, 기적을 추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오로지 믿는 자에게만 이해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이러한 예수의 정체성은 공자나 석가나 노자나 소크라테스나 마호메트 등 인류의 성현(聖賢)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예수의 유일성은 타 종교 창시자들에 의한 구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복음이 갖는 유일성이요 진리요 권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