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신학연구원 신원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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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천로역정의 시련보다는 차라리 육신의 욕구를 충족하던 속세(俗世)의 노예생활을 더 동경하며, 구원에 대한 감사 대신 불평만 늘어놓았다. 구원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기에 원망한다는 말인가? 어떠한 고난의 대가를 치르고라도 가나안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한히 감사하여야 될 일을 불평하였으니 어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육신의 사람들이 죽기까지는 가나안복지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탐욕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매일의 만나로 족할 줄 모르고 애굽에서 먹던 채소와 육류를 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식상이 될 만큼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위장 장애를 일으켜 죽을 만큼 메추리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니라”(골 3:5)고 한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등진 탐욕의 노예였던 것이다. 그러한 탐욕의 사람들이 어찌 천국에 적합한 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들이 죽기까지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대적하는 죄악의 사람들이었다. 고라와 그 일당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감수하는 모세에게 협조할 줄 모르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를 대적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을 용납지 아니하시고 공의의 심판을 내리사 졸지에 멸망시키셨다. 그 대적자들이 살아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불신의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탐지하고서도 거민을 삼키는 박토라고 거짓으로 보고하였고, 장대한 아낙자손들을 보고는 위축되어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수 없다는 불신의 보고를 하였다. 그 불신의 발언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좌절케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불신의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게 하셨다.
이처럼 불평하고, 탐닉하며, 대적하고, 불신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 모두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죽고, 새롭게 태어난 20세 이하의 중생한 자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기까지 40년의 시련의 기간을 요하였다. 그 중생한 사람들은 연대적인 고난으로 더욱 연단된 신앙의 선조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복지에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오직 새롭게 거듭난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신령의 의미를 제시한다고 보겠다.
전의 신학원 원장 신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