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기 생의 목표를 명확히 가늠할 수 없고 모호할 따름이었다. 너무 외로웠던가. 진한 허무의 무게에 짓눌렸었던가. 매일 보는 대상이 의사와 기계적인 간호원들 뿐인, 사슬 없이 수감된 수인이었던 것을.

세상은, 흰 병실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누워있는 결핵환자들과 욕심을 따라서 펄펄 뛰어다니는 바깥세상사람들과의 두 부류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었다. 그게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서일지라도.

영국특파원으로부터 귀국한 고진의국장의 부탁으로 신애의 퇴원수속을 하러 금희가 왔다. 비포장도로의 먼지답쌔기를 뒤집어쓰고 온 금희와 서울행 의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신애는 목숨을 담보한 전장에서 살아 귀향하는 병사가 이럴까싶은 기분이었다.

금희는 언니인 것처럼 신애의 손을 잡고 체중을 늘려야겠다고 한숨을 쉬었고, 진한 우정에 신애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고진의국장의 내년엔 원하는 대학에 가야지, 하신 권유에 힘입어 신애는 입시준비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탁상시계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녀는 시계를 노려보고 있다. 똑, 똑, 똑, 시간은 쉼 없이 앞으로 가고 있었다. 공장의 기계들이 멈추고 도시가 깊이 잠든 이 밤에도.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생의 짐을 싣고 내달려가고 있었다. 지상에서 허락된 삶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새삼 신애는 시간은 생명이니 촌음을 아껴야한다고 한, 아버지의 유언이 전류처럼 뇌리로 관통했다.

시간은 일방통행이다. 절대적인 신의 영역인 것이다! 아직은 무리라는 의사의 충고를 접은 채, 신애는 공부에 파묻혔다.

영양식을 하고 적어도 반 년 정도의 휴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지시를 그녀는 못들은 체하였다. 목적을 향한 몰입은 병약한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다음해 봄, 신애는 목표한 A대학 신방과의 합격을 따내었다.

불합격에 대한 불안감을 떨어내자 그동안 잘 만나지 못했던 금희를 만나고 드라마센터엘 마음 놓고 다니고 명동의 데아뜨르 카페로 커피를 즐기러 다니는 행복을 누렸다. 솔개의 날갯짓 같은 자유의지로 독서를 만끽해도 좋은 나날에 푹 잠기었다.

고진의국장은 이제부터 진정한 인생의 도전이 시작된 거라며 신애의 보호자가 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일본유학시절 아버지에게 후원받은 이야기를 하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병약한 아버지가 복사꽃 핀 과수원에서 자신이 어떻게라도 되면 자네가 신애의 진로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말을 상기하시며 사내아이에게 하듯 신애의 어깨를 툭툭 치셨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장충동의 가옥을 처분하고 근처의 작은 이층집으로 교체해 주었다. 금희를 배려한 일이었던 걸, 신애도 금희도 그 당시엔 짐작조차 못하였었다. 지붕 밑 방이 있는 아담한 이층집엔 수령 깊은 몇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어 맑은 바람과 창밖풍경이 마음을 안온케 해주었다.

전운의 여파는 아직도 개인의 운명과 사회를 혼란 속에서 허우적이게 했다. 금희의 사랑은 깨어졌고 돈에 눈 뜬 금희는 수입이 나은 야간 주점업소로 피아노를 치러 다녔다. 어이없어 신애는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다가 너, 환락가로 추락하겠다,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겁 없이 험한 데다 몸을 막 던지니? 지금 세상이 흙탕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 엉?

알았어! 하고 한참동안 침묵을 깨물고 있던 금희는 노인네처럼 처량한 넋두리 끝에 눈가에 물기가 어리었다.

너는 졸업하면 신문사 시험을 치르겠다고 하지만, 난 슬프다. 군대에 간 금호 오빠는 아주 직업군인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지만, 나는 무용가의 희망은 일찌감치 물 건너갔고, 피아노도 재정도, 학력은 어떻고? 난, 정말 살고 싶지가 않단 말이야.

이신중 씨의 이별선고에 금희의 우울증은 깊어갔던 모양이었다. 말로는 언제고 깨질 그릇, 일찍 잘 됐다고 피식거리면서도 멍이 다 가신 건 아니었던가 보았다.

금희! 똑똑히 들어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결과가 어떻게 될른 지, 시간이 지날수록 금희는 후회하게 될 거야, 남녀의 관계는 처음부터 정직한 선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라면, 금희는 진부하다고 하겠지만. 냉철하게 생각해봐. 인생은 연습을 불허하는 일회성의 무대라는 진실을.

이신중 씨는 단호하였지만 금희는 완강하였다. 그럼에도 이신중 씨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듯 피어리드를 꾹 찍었다. 나는 금희의 집요함에 동조할 수 없고, 이성을 잃은 사랑과 여자가 나는 아주 싫어!

금희의 연애는 그렇게 평행선으로 끝났다.

밤에 피아노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으며, 낮에는 입시 공부를 해, 그러면 안 될 게 뭐겠니?
신애는 진심의 충고를 하였다.

송충이 잡으러 갔던 먼 옛날, 남의집살이를 해서라도 꼭 경성의 무용학교에 다니겠다고 이 악물던 생각을 해봐. 그 때 어린 네 얼굴이 얼마나 의연했는지 넌 모를 거야. 그 어린 시절의 푸른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해! 용기 있게!

알았어! 알았다고!

어쨌든 금희는 돈을 벌고 싶다고 소릴 질렀다. 난,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너하곤 달라. 공부고 뭐고 때려 치고 돈을 벌어야 해! 나한테 대학은 그 다음 문제라고!

금희는 끙끙 하악하악 들숨날숨을 내리쉬며 굵은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동안을 그림자를 감춘 채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일주일을---, 한달, 두달을---, 금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너무 길었다.

금희는 이태원 거리를 걷고 있다.

어둠이 침착한 속도로 초겨울의 거리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한낮의 소요와 삶의 약동이 서서히 스러지는 시간이었다. 어둠은 저만치 햇살에 외면당해 있던 가로등에 주황색의 환상적인 빛을 피우고, 어디선가 몰려온 싸늘한 바람은 아스팔트에 궁구는 치즈 빛 낙엽들을 어디론가 몰아가고 있다.

이제 곧 주점들은 기지개를 켜고 생기 찬 몸짓으로 부풀 것이다. 나이트클럽에 불이 켜지고 낮 동안 쓸쓸히 먼지 쌓인 샹들리에는 현란한 빛을 발하며 음악소리에 취한 듯 도발하리라.

금희는 냉기로 무표정하게 경직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참 오랜만에 잔별이 돋은 하늘을 바라보는 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에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태원의 뒷골목을 느리게 걷고 있는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무엇보다 몹시 갈증이 났다. 약이라도 사먹을까 하고 약방 속을 기웃해 보다가 빈속임을 깨닫고 그냥 고개를 돌리었다.

택시를 탔다. 지친 그녀는 차창에 비친 자기모습이 마치 짓밟아 놓은 인형처럼 초라하게 느껴져 순간 섬뜩했다. 동자동으로 가 주세요.

그러나 이내 아니지 싶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