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희가 한국 민속예술제의 표를 보여주었다.

그이가 출연해. 봉산 탈춤을 춘대.

신애는 금희가 이신중 씨를 그이라 호칭하는 게 놀라웠으나 뭐라고 하진 않았다. 분홍옷의 땅딸막한 창녀의 팔을 끼고 누추한 골목으로 돌아가던 헐렁한 그의 뒷모습, 신애는 침묵했다.

오늘 밤 7시야. 가자.

금희는 보라색 플레어스커트 위에 어깨에 구름 같은 주름이 진 우아한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새로 감아 빗은 머리는 여전히 양귀를 덮어내려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목 뒤에 보라색 리본으로 얌전히 묶여있다. 처녀다운 애틋함과 싱그러운 향취가 담뿍 풍기는 자태였다. 반면에 신애는 꽁지 빠진 새와 같은 더벅머리에 검정 자라목 스웨터와 검정 바지차림이었다. 녹색 운동화까지 신어서 탁구라도 치러가는 모양새였다. 묘하게도 오늘따라 둘은 더 상반되는 앙상블이었다.

발갛게 익은 사과색 볼을 한 금희와 창백한 신애.

둘은 ‘쎄시봉’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락국수로 저녁을 먹은 후, 이화여고 강당으로 갔다. 신기하게도 관람석의 삼분의 이 이상을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승무, 칼춤, 장고춤, 부채춤에 이어 봉산탈춤의 순서가 되었다. 중의 타락상을 풍자한 일종의 가면극으로 봉산탈춤 중에서 팔묵승과장(八墨僧科場)중의 먹승(墨僧)의 가락을 발췌한 것이었다.

먹승의 탈춤을 추는 이신중 씨의 춤은 매우 활기찼다. 시대상을 꼬집은 해학으로 갈채의 파도를 이루었다. 열렬히 박수를 치고 난 금희가 신애의 손을 꼭 쥐었다.

신애는 이신중 씨의 탈춤에서보다 꽹과리를 치며 열두 상모를 돌리는 농악에 정이 가고, 줄타기하는 노인에게서 짙은 애달픔의 음영을 느꼈다. 꼭두각시놀음(인형극) 또한 울적한 신애의 마음을 틔워 주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둘을 이신중 씨가 근처의 대폿집으로 데려갔다. 보기 드물게 유쾌한 음성으로 이신중 씨가 드럼통에 둘러앉자마자 이것저것 안주를 청하였다. 아련한 눈빛으로 이신중 씨를 바라보는 금희를 유심히 살피던 신애는 확연히 구분지울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도깨비 같은 이신중 씨에게 일고 있는 걸 느끼고 당화했다.

드럼통 위에 푸짐한 술상이 차려졌다. 무섭게 매워 혀를 댈 수 없는 낙지볶음이랑, 파전, 부침개, 눈을 뜰 수 없도록 연기를 뿜는 구운 소의 내장은 신애로선 먹을 도리가 없는 음식이었다. 파전 부침개조차도 독한 고추를 넣은 탓에 신애의 혀는 반기를 들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의 막걸리는 시금 털털해서 두 모금 째엔 넘길 수가 없었다. 금희는 이신중 씨가 권하는 대로 받아먹으며 취한 목소리로 신애에게 속삭였다.

우울증 해소에 매운 음식이 특효래. 신애야, 어서 먹어 봐.

그러셨습니까, 저러셨습니까, 하는 칼로 저미는 듯한 존칭어를 구사하는 남자, 남몰래 창녀에게 가고 낮엔 점잔빼는 헐렁헐렁한 남자, 아저씨하고 부르면 딱 어울리는 남자---.

신애는 평상시의 흐린 회색빛이 아닌 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금희에게 화장실에 좀, 하고는 미친 사람들이 마구 떠들어대는 것 같은 곳을 빠져나왔다.

색조 깊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녀는 걷는다.

보라색 비단에 금빛수를 놓은 듯, 행복한 나라의 행복한 공주의 드레스라도 지으면 좋을 듯싶은, 달무리 진 밤하늘을 아득히 바라보며 신애는 쓸쓸히 집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다음 진료 때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보자고 하여 신애는 막막한 눈을 깜박이었다. 아까부터 금희는 입을 쑥 내밀고 있었다.

네가 정설리 집을 나온 건 열 번 잘한 일이지만, 그 탈춤 추는 헐렁한 남자 때문이라면, 너야말로 잘 생각해봐야 해,

신애는 말했다.

하지만 분홍옷의 창녀이야기는 생략하였다.

이신중씨의 수입이란 건 몇 안 되는 연구생에게서 받는 게 고작이라 직업을 구해야겠다는 금희의 말에 신애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함께 굶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금희의 단호한 결심에 신애는 이신중 씨가 한층 역겹게 느껴졌던 것이다.

금희가 이신중 씨와 합치고, 고립감에 빠진 신애는 서점과 극장을 순례하였다. 명동서점에서 세계전후문학전집을 사다 밤새워 읽고, 프랑스의 여자신인작가의 소설과 일본의 여자신인의 만가(輓歌)랑 신간서적을 한아름 사왔다. 히키코모리가 된 신애는 어느 날 어슬렁어슬렁 나와 국도극장에서 <스타 탄생>을 보았다. 제임스 메이슨도 쥬디 갸란트도 굉장한 배우였다.

매일 그녀는 검정 물감이 흩뿌려진 것 같은 나날들과 맞서 있었다. 수면부족으로 다래끼 돋은 눈으로 폐에 공동이 생긴 허약한 건강과 맞선 채.

신애는 아버지와 동의어로 여기는, 영국특파원으로 나가신 고진의국장의 귀국소식을 알기 위해 신문사에 들린 길에 명동까지 걸었다. 아직 저녁시간이을러서인지 피카소의 그림을 닮은 바의 분위기는 한적하였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절박하던 신애의 마음은 마티니의 솔잎 향에 명주실같이 올올이 풀리었다. 경쾌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어 신애는 피아노 쪽으로 고갤 돌리었다.

머리채를 보라색 리본으로 묶은 저 피아노 치는 여자는, 흐르는 구름같이 하르르한 보라색 블라우스의 여자는 금희가 분명했다. 바에서 ‘체리 핑크 맘보’를 치고 있는 금희는 사랑을 위하여 깨끗한 얼굴에 분칠을 했을까---?

‘엘리제를 위하여’를 열중하여 치던 금희의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진 신애는 그 곳을 나오고 말았다.

휘황한 거리를 뛰며 신애는 환멸과 타는 울분을 깨물고 금희의 이름을 부른다. 향락을 유혹하는 곳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금희의 사랑은 내일이 있겠는가.

상점 거리가 휙휙 흐른다. 화려한 양장점 쇼윈도엔 전후의 서양 마네킹들이 멋진 의상을 자랑하며 스쳐간다. 한 겹 뒷골목의 남루한 삶과 평행으로 존재하고 있는 도심의 휘황한 밤도 흐른다.

기침을 토하며 골목 길 가로등 밑에 웅크리고 앉은 신애의 손에 피가 묻어났다. 몰캉몰캉한 피가 넘어온다. 피식 웃어본다.

손바닥의 뭉글한 각혈을 응시한 그녀는 잠간 고개 들어 검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누군가 서둘러 그녀를 택시에 싣고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신애가 6개월 동안을 입원해 있던 요양원에서 나오는 날이었다. 환자복을 벗은 신애의 눈에 사뭇 세상의 빛이 달리보이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매일, 뒷산의 솔바람소리와 고개 들면 시야가득 들어오는 여러 표정의 바다와 그 바다를 나는 바닷새들의 비상은 신애의 꿈을 하얗게 표백시키는 것 같았었다. 자주 그녀는 노인처럼 현실과 미래에의 혼란에 빠지곤 하였었다. 자기 생명과 연결돼 있는 건강에 대해서조차 불확실했으므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