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억양의 공군과 열대식물이 가득한 집에서 신애는 초밥을 먹고 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내다보던 공군은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어딜 급히 가는 것 같았는데, 나 때문에 약속을 어긴 겁니까?
지금 가도 돼요.

식당에서 나와 신애는 급할 것 없는 이신중 씨의 탈춤 연구소를 향해 바삐 걷고 공군은 따라 갔다.

두 둥 둥둥둥---둥둥둥.

세 가면이 춤을 추고 한 가면은 장구를 친다. 다만 장구의 가면이 바뀌었다. 밖의 세찬 빗줄기처럼 신애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도취경에 빠져있었다. 정신이 든 그녀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군은 ‘이상한 춤도 다 있군’ 하며 그녀 뒤를 따랐다.

골이 난 표정인 신애는 미친 사람들예요. 했다.

다시 빗속으로 나왔다.

그녀는 무심히 걷는 거고 공군은 그녀를 향한 호기심에 이끌려 걷는다. 어디를 얼마쯤 걸었을까, 피곤한 신애는 ‘한일’이란 간판이 붙은 다방으로 들어갔다. 공군은 따라갔다. 위티(위스키를 탄 홍차)를 한 모금 마신 공군은 불쑥 생각난 듯, 말하였다.

이걸 보십시오! 여길.

허리를 굽혀 그가 비에 젖은 바지를 걷어 올린 맨다리는 덴 자국으로 엉겨 붙고 움푹 패여 끔찍했다. 신애는 자기 몸의 상처인양 고통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심한 화상이었다.

불에 덴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요?
아니죠, 고문 자국입니다.

헉! 신애가 당황하자 그가 이번에는 왼쪽 손바닥을 내밀어보였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문 자국---?’

격렬한 감정이 일어 신애는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

6·25 때, 난 스물한 살. 대학 2학년에 학도병으로 끌려갔죠.

순간, 신애의 정신에 불이 들어왔다.

‘학도병과 인민군 의용군---?’

지리산 전투 때 죽을힘을 다해 산속으로 숨다가 아군에게 붙들려 고문을 당한 겁니다. 변장한 인민군이라고. 발바닥은 더 보기 좋은 꼴이죠. 어디 한 번, 이 손을 만져 봐요.

예민하게 반응하는 표정을 보고 그가 신애의 손을 악수하듯이 잡았다.

우툴두툴하게 손바닥 근육이 엉겨 붙은 그의 손바닥을 신애는 떨리는 손으로 쓸어보았다. 극심한 고통에 대한 예리한 감정이 일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커피를 한 잔씩 더 마시고 다방에서 나왔을 때, 신애의 발길은 저절로 덕수궁 쪽으로 향하였다. 우산을 쓰고도 옷이 비에 젖어 한기를 느끼며 석조건물 계단에 우산을 받고 나란히 앉았다. 어떤 비오는 날,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비를 맞고 있는 제비처럼.

악을 쓰듯이 퍼붓고 있는 비를 응시하다가 신애는 공군 옆에서 죄 지은 생각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었다. 신애의 전신경은 고도의 렌즈처럼 공군의 고문자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의 고통이 전이되어 마침내 그녀는 그의 고문자국에 입 맞추지 않곤 견딜 수 없는 심정에까지 닿았다. 그렇지만 마구 달려드는 오한 때문에 더는 견딜 수 없어 그와 작별을 할 때, 신애는 빠르고 또렷한 어조로 말하였다.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던 약속의 말이었다.

내일 열두시 동화백화점 4층 음악실에서 만나세요!

그리고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미 밤이었고 억센 비가 그대로 오고 있었다.

평정을 찾을 수 없는 기분을 깨문 채 신애는 누웠던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왔다. 아직 덜 마른 축축한 풀색 코트를 걸치고서. 모진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듯이 여전히 비가 쏟아졌다. 끈덕지고 줄기차게 퍼부었다.

몇 시간이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헤매 다닌 끝에 신애는 이신중 씨에게로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충격이었다.

‘왜 나는 여기로 온 걸까…?’

이미 어둠이 두껍게 내린 시각이었다.

이신중 씨는 홀 뒤에 붙은 숙소의 야전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웬일이냐고도, 뭐라고도 묻지 않는다.

침묵을 고수한 채 그는 무슨 일이냐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하룻밤, 재워 주세요.

신애가 말했다.

안 됩니다. 여기가 숙박업소입니까?

한 박자도 두지 않고 딱 거절하는 그가 그녀는 신기하였다.

이상하기까지 하여 그녀는 빠르게 말하였다.

호텔에 갈 돈이 없어요.
여행잡니까? 왜 호텔엘 갑니까?
------?
돌아가요. 택시 잡아줄 테니.
‘바보 같은 남자’

신애는 모멸감을 깨물고 오십 몇 개의 계단을 공이 구르듯이 내려왔다. 금희는 부재중이었다. 금희의 부재에 어떤 계시를 받은 듯 신애는 다시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였다. 분노를 깨물고 빗속을 달리며 전율을 느끼는 그녀의 의식으로 공군의 고문자국의 극렬한 통증이 꼬챙이로 찌르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처절한 목숨의 불꽃.

어떻게 여길---?

공군은 놀랐다.

프런트에 물었어요.

그는 이내 납득한다. 내일, 동화음악실에서 만날 약속을 이 숙소 앞에서 했다는 것을.

흠뻑 젖고 창백해 보이는데, 어디 아파요?
배가 고파서요.

공군은 신애의 젖은 코트를 벗겨 의자에 걸쳐 놓고 자기의 잠옷 상의를 벗어 주었다. 블라우스 위에 덧입으니까 허벅다리 중간까지 내려오고 따듯했다.

조였던 마음이 조금은 안온하게 풀리는 성싶었다.

뭘 주문하면 좋겠습니까?
위스키 한 잔하고 햄치즈 샌드위치 같은 거면 좋겠어요.

그녀는 창밖의 캄캄한 유리창을 보며 입엣 말을 웅얼거렸다.

아, 잠들고 싶어. 오래오래 잠들고 싶어.

아, 불면증---? 하고 공군은 음식을 먹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샌드위치를 반밖에 먹지 못하고 신애는 위스키를 마셨다.

팔걸이의자에 깊숙이 앉아 신애는 전쟁 때 겪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알코올에 그녀의 눈꺼풀은 점차 무겁게 내렸다.

서로, 이름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냥, 공군 중위로 좋아요. 사천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