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타인의 오해를 사게 된다는 걸 그녀 스스로는 모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영혼에 내재한 정신을 읽지 못한 채 겉보기로 안이하게 정의해 버린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그것에 그녀는 일종의 상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타인에 대한 이해라고 단정 짓는 그들의 곰팡이 낀 고정관념을 내심 무모하고 경박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명동까지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신애는 극히 짧은 순간 미장원에 들어갈 생각을 한다. 미장원엘 가다니, 처음 해본 생각이었고 행동이었다. 흑백을 엇갈리게 칠한 문을 선뜻 밀고 들어갔다. 처음의 경험은 무엇이고 누구든 조금은 서툴기 마련일 테지만, 어색함을 은폐하려고 그녀는 필요 이상 목소리를 높여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였다.

이 머리, 오드리 헵번처럼 컷해 주세요.

전면거울에 오드리 헵번의 숏컷한 사진이 다른 외국배우들 속에 유독 크게 붙어 있었다. 질끈 묶은 목 뒤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그녀는 질린 얼굴이었다. 순간, 등의 어디쯤에서 차가운 땀이 오소소 돋는 것 같은 느낌이 치밀었다.

미용사가 친절하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목에 흰 천이 둘러지는 걸 거울 속으로 보며 신애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싫고 어색하여 하마터면 고개를 가슴팍까지 푹 숙일 뻔하였다. 미장원 안은 한낮을 차단하듯 밖의 빛을 송두리째 밀어내는 커튼이 쳐져 있고 레이스의 갓을 씌운 나팔꽃 모양의 형광등 불빛은 스러지는 석양빛 같이 서러운 기분이 들고 아늑하였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의 그 사진관 안의 까맣고 긴 세 다리의 사진기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허기지고 미열이 나서 눈을 바로 뜰 수 없을 만치 휘도는 현기증이 일어 신애는 눈을 감았다.

싹둑, 싹둑, 싸악, 싹--- 리드미컬한 가위소리가 생동감 있게 들리기 시작하여 잠시 동안은 시장기로부터 놓여나게 하고 조금은 느슨한 기분이었다.

좀 서운하시죠?

미용사가 물었다.

네, 라고 신애는 거짓말을 하였다.

아까우시겠어요. 이 머리 몇 년이나 기르신 거예요?

그냥---둬서요.

머리카락 따위가 아깝다니, 신애는 긴 머리를 가지고 싶어 기른 건 아니었다. 때로 힘들어 짜증을 누르며 아버지의 긴 병간호를 하며, 세상이 귀찮아 아버지가 가꾸시던 안마당의 꽃밭의 잡초처럼 그냥 내버려뒀었던 것뿐이었다.

직업상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에선지 성정이 말하는 걸 좋아하는 수다쟁이인지 입이 큰 미용사는 자주 웃어 보이며 말을 시키더니, 아주 다정한 웃음을 보이고 어떤 대학이냐고 물었다.

학교 배지를 달다니, 질색이었다. 훈장처럼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건 머저리 같은 A대 생들뿐이었다. 그들은 소위 일류대생이란 프라이드가 있을 테지만, 더는 대꾸할 맘이 없어 신애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감은 안막 속으로 아버지가 둥둥 어룽져온다.

현란한 봄의 햇빛이 들어찬 서울역 부근의 세브란스병원 현관에 망가진 장난감인양 주저앉은 아버지의 얼굴은, 하얗게 시고 무섭게 야위어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었다.

신애야, 의사가 뭐라든? 이제는 가슴사진만 찍으면 된다는 거냐?

잔뜩 지치고 피곤한 아버지가 물었다.

아버지, 점심시간이라,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해요.

조르는 아이 달래듯 신애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보듬었다.

고만 눕고 싶구나. 어서 집에 가고 싶구나.

아버지의 눈은 살고 싶다는 욕망과 피로에 지쳐 줄 수 없는 것을 조르는 아이처럼 집요한 애원에 차 있었다. 이미 그 때 신애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버지와 사별의 악수를 나눈 서글픈 기분이었다. 의료기술과 의료약품이 결핍상태인 종전 후라 폐암은 손을 쓸 수 없는 사형선고였고 아버지는 전신무력증까지 겹쳐 완치가망이 희박한 중환자였다. 아버지의 폐 X-ray는 수술 불가능을 찍어내었다.

그날부터 신애는 아버지와 한 방에서 스물네 시간 병간호를 해야 했다. 약도 음식도 이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아버지의 육신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대소변을 가누지 못할 정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똥이 뭉개어진 아버지의 야윈 궁둥이를 매일 비눗물로 씻어줘야 했다.

하루하루 신애는 죽음과 생활했고 죽음과 대결하였다. 무모하게도 그녀는 어떤 불행도 죽음까지라도 극복할 수 있으리란 의지와 싸우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세상을 끝까지 가본 것 같이.

유난히 청결의식과 결벽증이 강한 아버지는 딸에게 당신의 속살을 보일 때면 미안하고 계면쩍어 그 순간만은 아픔도 병도 잊고 만다. 그렇지만 신애는 울음을 깨문 채 말하곤 했다.

아버지! 괜찮아요, 정말 난 괜찮아요, 아무 신경 쓰지 마세요!

*

갑자기 목이 멘 신애는 난생 처음 미용사에게 얼굴을 맡긴 채, 아버지가 눈을 감던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우고, 뒤를 이어 떠오른 그 악랄한 이시가와에게 치욕을 당하던 엄마의 생각을 꾹 삼켰다.

인간은 어디까지 비참할 수 있고 어디까지 가야 생의 애착에서 놓여날 수 있는지, 한 곳을 뱅뱅 돌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헤치며 불현듯 일서의 영상이 다가왔다.

마침내 정전협정이 되고 몇 년 후에 아버지가 신애 가슴에 안겨 숨을 거두시고, 고아가 된 신애가 슬픈 여대생이 되었음에도, 일서는 돌아올 줄 모른다. 어디 일서뿐이겠는가.

1.4 후퇴피난길의 폭격에서 행방불명이 된 은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생사확인을 찾아 나선 신애의 삶의 길은 언제 어디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는지---?

풋내기 여대생들이 보들레르와 릴케와 ‘이니스프리 섬’을 읊는 밝은 시간에 신애는 컴컴한 동굴에 웅크리고 생과 사의 끝 모를 의문에 빠져 깨어 있곤 하였다. 까뮈와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고 카프카와 토스토에프스키와 전후세계문학전집에 밤새워 고개를 박고는 하였다.

그녀는 점점 더 깊은 검정색 이외의 색깔을 거부하게 되어가고, 타인을 거부하였다. 타인들에게 받는 관심과 이해에는 한층 무관심하게 외면하고는 하였다. 남들이 쫓는 삶에 관한 지상의 질서를 무시하고 싶었고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생각하지 않았다.

싹둑---싹둑악 싸악---

쇳소리가 그녀에게서 젖은 짚단 같기도 하고 깃털 달린 날짐승의 것 같기도 한 냄새를 씻어내 주고 새처럼 가벼운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서서히 오르는 이마의 미열이 안온하게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