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추운 날씨만큼 폭격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엄마와 동생들이 피난을 떠난 날 밤, 앞집이 폭격을 맞아 문간채가 폭삭 내려앉았다. 하루 밤새에 시내의 중심부인 부촌은 폭격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근심과 두려움에 지친 아버지의 병세는 하한선으로 치달았다. 죽조차도 토하시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갔다. 공포와 불안 속에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모든 일상의 틀은 뒤틀리고 아귀가 엇가기만 하여 신애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둘이 남은 지 사흘째 되는 밤에 일서가 숨이 목에 차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색이 된 일서는 아버지에게 난데없이 큰 절을 올리고는 눈물부터 쏟았다. 용감하고 의지 굳은 일서의 행동으로 보아 무슨 일이 나도 아주 크게 났다는 느낌에 신애의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외삼촌, 하고 부르짖은 일서는 억누른 울음을 터트렸다. 중공군의 행렬이 지나간 평택부근에서였다. 후한 돈을 주고 가까스로 농가의 광을 얻어 하루 밤을 지샌 엄마는 서둘러 길을 재촉하였다.

이모가 사는 온양에 닿기만 하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것처럼 고단하고 불안한 엄마는 서둘렀다. 피난민행렬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순식간에 나타난 제트기가 벼락 같이 퍼붓는 폭격에 길을 가던 피난민들은 뻥튀기 터지듯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동생 둘과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앞서가던 일서는 밭고랑으로 처박혔다. 여기저서 신음소리와 아우성이 터지고 아수라장이었다. 정신을 차린 일서가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막내를 업고 뒤 따라 오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소리쳐 부르고 불러도 도무지 아이 둘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식구가 없었다. 잽싸게 앞서가던 은애도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리어카에 탔었던 두 아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녕 일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길엔 낙엽 지듯 떨어진 시체가 즐비하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공포에 치어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치며 아우성이었다. 폭격 맞아 파진 웅덩이에는 부상자와 죽은 사람들이 겹겹이 엎어진 모습은 차마 눈으로는 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 저마다 식구들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통곡소리와 창자가 끊어지는 절규가 하늘을 찔렀다.

또 한차래 중공군의 남침 길을 차단하려는 유엔군의 폭격이 지나간 후였다. 노부모와 아이들을 태운 수레를 끌고 집 떠난 피난민들은 새총에 픽픽 떨어진 참새들처럼 사방에 죽어나자빠져 있었다. 부상자들은 다친 맹수들처럼 포효하였다.

그래 식구들을, 아이들과 네 외숙모를 아무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냐?

아버지의 음성은 갈라지고 곧 기침을 토하셨다.

네. 외삼촌!

일서의 음성은 떨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릎 꿇고 앉은 일서는 머리를 방바닥에다 짓찧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외삼촌!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의젓하던 일서는 황소 같은 통곡을 터트렸다.

자기 보퉁이를 진 은애는 앞서서 가고 있었는데, 날쌘 은애가 죽었을 리 없다고, 부상을 당해서 어딘가로 실려 갔을 거야.

일서는 애원이 담긴 눈으로 신애를 바라보았다.

시체를 삼킨 웅덩이는 사방에 활화산의 아가리처럼 움푹움푹 패인 채 널려 있고, 모질고 참혹한 현장을 덮으려는 듯 하늘엔 진회색구름이 깔리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신애는 처절한 비통함에 입을 앙다물었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도 신애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아버지는 병마에 지지 않으려고 쓴입에도 음식을 드시려고 애쓰는 모습에 신애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약한 신애는 감기가 들고 몸살이 난 아픔을 버티고 아버지 앞에 씩씩한 척해야만 했다.

하지만 피난길을 나선지 사흘 만에 엄마와 동생들을 잃고 누구 하나 시체조차 찾지 못한 참극에 신애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무엇을 위한 살생인지, 폭격은 연일 계속되고 전쟁은 끝날 줄 모른다.

‘초콜릿 기브 미!’ 가 어떤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던 은애의 짧은 생은---? 줄곧 내리는 눈은 신애를 결박하고 있는 통분의 슬픔처럼 그칠 줄 모른다. 방 안에서도 귀 바퀴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강추위가 계속되는 아침이었다.

밤새껏 냉방에 웅크리고 있던 일서가 느닷없이 안방으로 들어와 아버지께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외삼촌, 다시 평택에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바로 어저께 평택에서 돌아온 일서는 울먹이며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을 못하시고 돈을 꺼내주시고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실 뿐이었다. 신애는 순간 어떤 의문이 들었으나 뭐라고도 입을 열지를 못하였다. 대문으로 따라 나간 신애의 손을 잡고 일서는 씩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신애야, 희박하지만 미라클은 있는 법이니까. 응? 나는 기적을 믿고 싶다! 나도 그래, 일서오빠! 금방이라도 은애가 뛰어 들어올 것 같으니까!

실제로, 신애는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신애야 외삼촌 잘 보살펴 드리고, 잘 있어라.

알아 일서오빠, 오빠도 밥 사먹고 잘 갔다 와! 국밥을 판다니까,

그래, 걱정 마---. 그럼 나, 간다!

그렇게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선 일서는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제 3 부. 작약도의 시
눈부신 태양빛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여지없이 쏟아지는 한낮, 신애는 극장에서 나와 영화에서 받은 여름 꽃 같은 향취를 반추하듯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영혼 속까지 비칠 것 같은 뜨겁고 투명한 여름 햇살의 물결 속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가 쓰려오고 진땀이 난다. 동시에 에메랄드인 양 빛나던 오드리 헵번의 동공이 야광석처럼 떠오르고, 요정 같은 그 배우의 짤따랗게 친 머리 모양이 새털처럼 상쾌하게 느껴져 왔다. 핑 도는 시장기를 안고 전쟁의 상흔이 남은 어수선한 도심을 그녀는 걷는다.

검정 바지 위에 검정 블라우스 차림은 통이 좁다란 바지에 몸 전체가 가늘어 암사슴처럼 날렵해 보인다. 검정색을 즐겨 입는 건, 타인들이 의심스러워하는 퇴폐적인 기분이나 그런 류의 반항적인 기분에서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상복의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았고, 꼭 그렇지만도 않은 정신을 그녀는 블랙에 품고 있었다.

글쎄, 뭐라 설명하면 좋을는지.

이미 타인의 오해에 익숙해져 있는 그녀로서는 꼭 끄집어내어서 자신을 이해시키고 싶은 생각과 의욕은 조금도 없다. 좀 더 세밀히 말하면, 안의 자아와 밖의 자아가 극단적일뿐더러 밖의 표정으로 점점 더 안의 자아는 견고하고 두껍게 본성을 가려가게 되었던 것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