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서는 금방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계절이 바뀌자 아버지가 몸져누우셨다.

누님의 아들이라는 혈연관계를 넘어 아버지는 일서를 신뢰하여 소년에 불과한 일서와 자주 심각한 이념과 전쟁후의 나라사정이며 일서의 진로문제를 나누곤 하시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과 식민지백성으로 전쟁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들던 경험담과 도달하고자 한 아버지의 이상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각하게 토로하셨다.

그 중에도 아버지는 책상 앞에 붙여 있는 센닌바리를 가리키며 일서에게 말하셨다. 천 사람의 여자들이 무명수건에 붉은 실로 한 땀씩 무운장구라는 글자를 수놓은 것은, 살아서는 결코 내 나라 땅을 밟지 못했을지 모를 남자들의 목숨을 건진, 의지 강한 조선여인들의 간절한 기도이기도 했다고 역설하셨다.

저것은, 한 땀 한 땀 네 외숙모의 염원이 담긴 영혼의 핏줄 같은 것이다. 죽는 날까지 내 몸에서 뗄 수 없는 신부(神符)인 것이다, 알겠느냐?

아버지는 신애보다 고작 한살 위인 일서를 신임하시어 중병의 몸으로 대치한 작은 남양군도에서의 극한적인 노동과 패망한 일본의 잔악상을 차근차근 얘기하셨다.

동족끼리 피바다를 부른 6.25 전쟁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망한 투쟁 또한 결국엔 밥그릇 싸움이라는, 신애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긴 대화를 아버지는 일서와 나누시곤 했다.

학구열에 불타는 일서에게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 평화시대가 되면, 그가 공부하겠다는 데까지 외국유학을 가겠다면 거기까지도 학자금을 대 주겠다는 언약을 주셨다. 힘껏 노력하여 너의 날개를 펼치라고 하신 아버지의 굳센 약속에 일서는 용기충천 했다. 아버지 서재에 박혀 그는 신애의 교과서와 참고서를 쌓아놓고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공부에 몰입하였다.

요즘, 저녁이면 부대 주변으로 색깔 요란한 옷을 입고 입술에 빨간 칠을 하고 얼굴에 덕지덕지 분을 바른 여자들이 꼬여 들었다.

헬로우, 헬로우! 달링, 달링!

그게 무슨 뜻의 말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굶지 않기 위해 그렇게 교태를 부릴 수밖에 없는 양공주들이었다. 그런 여자들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여 은애는 명자를 만나지 않는 것 같아 신애의 마음을 놓이게 하였다. 책상에서 영어교과서를 보고 있는 신애에게 은애가 속삭이는 어조로 말을 시켰다.

언니야, 내가 말하면 비밀 지켜줘야 해!
신애는 뭔데, 하고 물었다.
글쎄 비밀을 꼭 지켜준다고 약속을 해!

은애는 요즘 신애가 주는 숙제를 꼬박꼬박 하고 고분고분 얌전해져서 신애는 약속한다고 말했다.

글쎄, 언니야, 명자가 말이야, 임신을 했어.

뭐얏? 불현듯 신애는 같은 반인 뒷집의 옥동이 사건이 상기되었다. 엄마가 장에 간 사이, 문이 열려 미군에게 겁탈 당한 옥동이는 얼마 전에 소파수술을 받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당공 딸과 둘이 살던 옥동이 엄마는 정신이 돌아 옥동이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쏘다니는 처절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갓 초경을 치른 소녀애가 임신을 하다니, 경악하는 신애의 귀를 손바닥으로 덮듯이 은애는 명자가 그저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양양한 표정이었다.

뭐야? 옥동이가 죽은 수술을 했단 말이야?

은애는 집요한 신애의 추궁에 명자가 수술하는 병원에 같이 갔었다고 토해내고 말았다. 오늘따라 은애는 새로 감은 단발머리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유난히 청순해 보였다. 차분한 모습으로 대청 끝에 걸터앉아 사과를 껍질째 와작와작 먹는 은애의 무릎엔 바이엘이 놓여 있었다.

언니야, 학교 뒤에 사는 순자하고 학교에서 피아노 치기로 했거든. 괜찮지?

신애는 늦게 오지는 말라고 엄하게 타일렀다.

언니, 한 시간만 피아노 치고 올 거야,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 과수원에서 오시기 전에 와야 한다. 알았지?
알았어 언니, 하고 은애는 바이엘을 끼고 깡충거리며 나갔다.

집을 나오자 은애는 큰길로 가지 않고 뒷길로 접어들었다. 학교가 보이는 삼거리 골목에 서 있는 명자를 발견한 은애는 바이엘을 쳐들어 보이며 뛰어갔다.

신애 언니한테는 영주 만나서 학교에서 피아노 친다구 했어. 너 만나는 거 알면 불벼락에 그 때처럼 금족령일 테니까.

은애는 조롱에서 놓여난 새처럼 키드득거리며 즐거운 기분에 들떴다. 신나게 걷고 있던 명자가 갑자기 꿀꿀이죽을 먹어봤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은애가 그걸 어디서 먹었느냐고 의아해 하자,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고 배창수가 땅겨 쥐라도 먹을 판인데 어떻게 안 먹니? 그건, 미군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통에 모아다가 시장에서 한 그릇씩 파는 거야,

명자는 명랑하게 들떠있었다.

폭삭 거렁뱅이가 된 사람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랑 지게꾼이랑 어쨌든 배곯은 사람들이 허겁지겁 꿀꿀이죽을 사먹는 아침 시장은 북새통이라고 명자는 입맛을 다셨다.

부모의 지붕 아래 있는 은애와 달리 집에서 쫓겨나와 굶은 끝에 꿀꿀이죽을 사먹기도 하고, 병원에서 양다리를 벌리고 수술을 받기도한 명자는 세상을 보는 눈에 곰팡이가 끼어 있다는 걸, 은애는 알 리가 없었다.

하워드가 안경 쓴 그 백인을 데리고 온댔어. 레이션이랑 초콜릿을 많이 가져온다구 했어. 우리 재미있게 놀자. 재미있는 사진도 보여줄 거야.

오늘 일을 마련한 명자는 의기양양 자랑이 많았다.

지난번에 낙하산부대는 개성 가까이까지 갔다가 거의 다 전사하고 다섯 명만 살아왔다. 그 다섯 명 중에 명자가 사귀는 하워드도 끼어있었다. 그래서 오늘 축하파티를 하는 거라고 명자는 산들산들 웃었다.

운동장에서 공차기를 하는 조무래기들과 고무줄넘기를 하는 여자애들을 피해 명자는 학교 뒤쪽으로 접어들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멀리 보이는 하워드가 모자를 흔들어 보이자, 멈춰선 명자가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안경 낀 마이클만 데려온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많지?

휘익 휘익 휙 휙--- 신나게 휘파람소릴 날리며 손을 흔드는 미군들을 보고 은애도 놀랐다. 미군들은 다섯 명이었다. 명자는 미군들이 많으니까 더 재미있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은애는 영어단어 몇 개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미군들과 손짓 눈짓으로 이야기하며 논다는 데에 마냥 호기심이 부풀었다.

휙-휙-휘익 휘익, 쌔액 쌔액---.

미군들이 날리는 손깃발과 함께 행진곡 같은 휘파람소리가 학교 뒷산의 숲을 타고 하늘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