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퇴각하는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밤낮 없이 유엔군의 폭격기가 살상의 불을 뿜는 세상이 것만, 과수원의 복숭아나무엔 크레파스로 그린 것처럼 수밀도가 주렁주렁 익어가고 있고. 사과나무엔 연록색의 색연필로 칠한 것 같은 푸른 사과가 눈 시리게 달려 있었다.

새빨간 고추잠자리와 된장잠자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명난 원무를 추고, 미루나무의 우듬지마다 엔 둥지를 튼 까치들이 새끼들에게 연신 모이를 물어다 주느라 꺅꺅대며 힘찬 날갯짓을 한다.

머리에 해가리게 세수수건을 쓴 아주머니들이 잰 손으로 익은 복숭아를 따고 있었다. 신애는 일서와 원두막으로 올라가 새 지푸라기 냄새가 후각으로 스미는 멍석 위에 피곤한 다리를 뻗고 앉았다. 멍석에 놓인 밀짚부채를 부치며 일서는 심각한 어조로 토하였다.

너한테 말하는 건데, 난 정말 더는 못 견딘다. 학교에 다녀야지. 지게 지고 밥 세끼 벌어먹으려고 죽을둥 살둥 그 무시무시한 38선을 넘은 건 절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일서오빠, 내 교과서로 공부하면 되잖아?
그렇게 조각 공부해 가지고 뭐가 되겠니? 난, 광활한 우주과학자가 되고 싶은데, 돈에 미친 어머니 밑에서 뭘 어떻게 더 참겠느냐 말이다?

그 날, 일서는 과수원지기 아주머니가 감자 넣고 끓인 옥수수가루 수제비를 두 그릇이나 먹고 무거운 복숭아 소쿠리를 들어다주었다. 우물에서 세수하고 난 그가 잊은 말이 생각난 듯 정색을 하였다.

신애야, 너한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라는 거. 넌, 알지---?
일서오빠, 아냐, 아냐!

신애는 항의하듯이 고갤 저었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평양을 향해 떠난 일서.

그 영민하고 불행한 일서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매일 늦장마비가 내렸다.

서울이 수복되고 폭격이 잠잠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연일 비가 내린다. 신애는 현기증을 누르며 우비를 입고 장화를 챙겨 신고 빗속으로 나갔다.

용미가 중태라니, 용미는 대처승의 딸이고 신애보다 한 살 위인 숙성하고 다부진 짝꿍이었다. 농과대학 부근에 사는 경희가 어저께 와서 용미의 음독소식을 알려 주었다.

고작 여중 3년생이 양잿물을---?

전쟁으로 휴교한지 몇 개월 사이에 무엇이 사춘기 소녀에게 독을 마시게 했단 말인가, 신애는 발걸음을 빨리하였다.

사거리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마니를 덮어놓은 시체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장대비 속에 우산들을 쓰고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낙오된 인민군의 시체는 여러 구였다.

가마니 밖으로 나온 한 시체의 손은 빗물에 불어 고무제품처럼 퉁퉁 부풀어 있고, 한쪽 군화가 벗겨진 시체의 발은 삐져나온 발가락들이 부패하기 시작하여 끔찍했다.

전쟁의 잔악함에 어른들은 끌끌 혀를 차고,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이들은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없이 시체구경에 몰두해 있었다. 신기한 물건 구경하듯 눈빛을 또록또록 빛내며 시체 앞을 떠날 줄 모른다.

 신애는 얼른 발걸음을 돌리었다.

일서는 어떻게---? 혹시 저렇게---?

부디 연합군이 승리하여 학구열에 불타는 그가 다시 돌아와 우주과학자의 꿈을 성취하기를, 신애는 짧은 순간 간절히 기원하였다.

우비를 입었어도 비바람은 사정없이 치마를 적시고 우산대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차게 몰아쳤다. 오한을 견디며 신애는 빗속을 걸어갔다.

용미가 음독을---? 왜---?

신애로서는 새까만 수수께끼일 따름이었다.

용미를 마지막 본 것은 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쯤 되었을 즈음이었다.

전쟁 전에도 공휴일이나 일요일 같은 때 그녀는 사과빛 뺨이 되어 시내에 있는 신애네 집에 놀러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 날의 용미는 먼 길을 걸었는데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 밑과 왼쪽 뺨에 시퍼렇게 멍 자국이 나있었다. 신애를 보자 용미는 대뜸 울음부터 터뜨렸다.

스님인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했고, 절 근처에 주둔한 부대의 군인과 소나무 숲에서 연애를 하다가 들켰다고 흐느꼈었다.

연애를 하다니---?

충격을 받은 건 신애 쪽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학생이 아닌, 군인이란 말에 신애의 당혹감은 극대화되었다. 용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꺽꺽 목쉰 소리로 떠듬거렸다.

나, 그 군인 따라 갈 거야. 부대가 금방 이동한대,

용미는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신애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뭐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의 부대가 떠나면 잊게 될 것이다, 전쟁이 잠잠해지면 공부에 매달려야 여고로 진학하고 대학에도 가야지, 하고 신애는 절대로 용미의 귀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말을 열심히 충고해 줄 수밖엔 없었다.

비를 맞고 온 신애를 본 용미 어머니는 반가움과 슬픔이 밴 얼굴로 신애의 손을 부여잡고 용미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용미는 시체 같은 몰골로 누워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를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의 장애를 뛰어넘을 수단으로 양잿물을 삼키다니---?

전시라 도립병원은 의사도 약품도 귀하고 부상병들로 꽉 차서 병상이 있을 리 없다고 했다. 사흘에 한 번씩 용미는 먼 도립병원으로 리어카에 실려 통원치료를 하러 다닌다고 했다.

양잿물이 얼마나 독한지 입에 넣자마자 뱉었는데도 그녀의 목구멍은 양은젓가락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할 정도로 오그라들었던 것이다. 전혀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겨우 모기소리만 했다.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귀를 바짝 갖다 대어도 소용이 없었다.

먹지 못한 몸은 쇠잔할 대로 쇠잔하여 무서운 몰골이었다. 누운 채 용미는 잡기장에다 그림 그리듯이 썼다.

미안해, 합창 연습할 때, 네가 향숙이와 더 친하다고 오해했던 거, 미안해.
알았어. 알았어. 괜찮아.
신애야, 나 죽지 않을 거야. 꼭 그 군인 따라갈 거야. 그 사람 이름 강철수야. 너네 집 주소를 가르쳐주었어. 편지 오면 나한테 갖다 줘. 너는 진짜 내 친구야--- 응?
그래그래 알았어! 편지 오면 금방 가지고 뛰어올게. 약속할게.

용미를 안심시키기 위해 신애는 생선가시같이 앙상한 용미의 손을 끌어다 새끼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용미의 양쪽 눈에선 방울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거짓말처럼 불쑥 신애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솟았다. 한동안 그렇게 두 소녀는 말없이 창호지 문밖의 빗소리만이 적막하게 들리는 방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형상으로 쓴 용미의 글씨를 볼 적마다, 신애는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이 나곤 했다. 그 글은 도저히 무엇으로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는 없는, 이 세상에서 짧은 생을 산 용미의 마지막 유서가 된 때문이었다.

사흘 후에 신애가 다시 갔을 때, 이미 용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신애가 다녀간 다음날 새벽에 용미의 숨이 끊겼다고 젊은 용미 어머니는 흰 행주치마로 얼굴을 덮고 오래도록 흐느끼셨다.

살겠다고, 죽지 않고, 그 군인 따라가겠다고 굳센 의지를 토하던 용미는 신애에게 편지부탁을 하고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생을 놓았던 것이다. 용미의 포화속의 어린 사랑은 신애의 잠을 앗아갔다. 존재의 상실감은 나약한 신애의 정신에 한없는 허무의 생채기로 남아 아물 줄 몰랐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