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한때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선교사역의 동역자였던 데마(Demas)의 이름이 골로새서(4:14)와 빌레몬서(1:24)의 문안 인사에 기록되어 있다. 헬라어 명칭 ‘데마’는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주후 1세기 새로 설립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던 지도층 인물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세계 선교 사역을 위한 신실한 조력자였고,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열렬하게 고백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교회로 인도했던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주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려는 마음까지도 소유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도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진리의 말씀, 권면 및 훈계를 늘 들으며 지냈다. 스승 바울은 데마가 자신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교회에 끝까지 남아있을 것으로 신뢰했다. 바울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제자 누가와 데마를 같은 지면에 두 번이나 기록한 것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골 1:14, 몬 1:25).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시고 선택한 선교사 바울을 수많은 사역지로 보내면서 필요 적절한 조력자를 만나게 했다. 유럽 최초의 교회 빌립보에서는 신실한 여류 사업가 루디아를 기도 처소에서 만나게 했다. 루디아는 자주색 고급 염료를 제조해서 옷감을 만드는 대 사업가였다. 그녀는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바울의 사역에 적극 협력했다.

루스드라에서는 사랑하는 제자요 후계자인 디모데를 만나게 해서 이방인 선교 사역에 효율성을 크게 높이셨다. 최고 율법 전문가 아볼로를 사도 바울에게 보내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수월하게 전파되도록 했으며, 천막 제조업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동역자가 되게 해 바울에게 큰 힘이 되도록 했다. 한때는 데마 역시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한 탁월한 조력자로 활동했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기록될 당시, 조력자 데마는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에 선교사역차 머물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데마는 그리스도 신앙을 모두 버렸다. 하나님의 교회보다 육신이 즐거운 타락한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늙고 병든 스승 사도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향했다(딤후 4:10).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한 것은 단순히 지역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변이까지를 동시에 말한다. 세상을 사랑한 데마는 오래 전부터 영적인 스승 사도 바울을 떠나고 싶었지만, 제자로서 마지막 남은 양심과 의리 때문에 얼마간 멈칫하고 있었다. 드디어 스승 사도 바울의 죽음(순교)이 다가오자 데마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세상을 향해 떠났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어 늙으면 쇠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진다. 주후 34년 회심하고 68년 순교할 때까지 굶고 헐벗고 투옥되는 등 엄청난 고통을 당했던 바울의 노년은 더욱 쓸쓸하고 고독했다. 老사도 바울을 배반한 데마의 사악한 행동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됐다. 도움이 필요하고 약해져 있을 때 이웃을 돕는 것은 참된 기독교인의 바른 태도이다. 늙고 병든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 데마 때문에 큰 실망에 빠지게 됐다. 사도 바울의 순교 직전에 제자 데마는 스승을 위로하고 고통을 공유해야 했었다.

어느날 데마에게 세상을 향한 유혹이 물밀듯 밀어 닥치자, 어쩔 수 없이 타락하게 됐다. 초라하고 왜소하고 생명에 위험이 늘 있는 주후 1세기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향락주의에 미혹돼 하나님의 교회를 과감히 버리고 떠나게 됐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 및 명예 등에 최고의 가치를 둔 데마는 하나님의 교회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 영적 간음을 하고 있던 데마에게 사도 바울의 질병과 곤경은 큰 부담이요, 짐이 됐다. 스승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담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 고난에 처한 바울과 동역할 수는 없었다. 신실했던 초심을 모두 버리고, 사도 바울과 하나님의 교회를 떠난 데마는 배신자로 낙인 됐다. 초년에는 교회의 신실한 지도자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해서 널리 소문났던 사람이 마지막을 잘 처리하지 못하므로 타락자요 배신자가 됐다.

비록 인생 초년에 여러 가지 실수로 큰 오점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말년에 마음을 바꿔 회개하고 돌아오면 영웅이 될 수 있다. 특히, 자신을 가르쳐 사람 되게 했던 스승을 배신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늙고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스승의 곁을 무정하게 떠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행동이 된다. 어렵고 힘들 때에라도 끝까지 옆에 있어주는 태도가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이 된다.

현대 사회는 연약한 스승이나 부모 또는 지도자를 함부로 버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과감히 떠나는 경향이 많다. 오늘날 매스컴은 의리 없는 자녀, 제자 및 동역자들의 모습을 연일 기사화 한다. 교회나 정치권, 사업상 거래처에도 의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힘빠진 지도자를 과감히 버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신실하고 정조 있는 크리스천을 만나고 싶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만나며 베푸는 기회주의자보다, 한번 맺은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지조를 보수하는 우직한 인물이 오늘날 공동체에 필요하다. 어렵고 힘들 때를 피해 떠나는 변절자나 배신자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당(黨)을 이리저리 옮기는 정치인이나, 큰 교회를 좇아서 사역지를 옮겨 다니는 목회자를 우리는 성숙한 리더라고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