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그림.

인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와 세상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기준 가운데 하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오랜 기간 대립해 왔고 최근까지도 그것엔 변함이 없다. 그러다 얼마 전 ‘창조론의 승리’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의 청원으로 과학 교과서의 진화론 관련 내용 중 일부가 수정 혹은 삭제된 것. 교진추는 “가설을 정설화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진화론을 공격했고 이것이 빛을 봤다.

획기적이었다. 과학 교과서의 진화론 내용 개정에 부단히 애를 썼던 교진추로선 처음 얻는 가시적 결과였다. 그 동안은 법적 소송 등 많은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번번이 고배만 마셨다. 교진추는 이번 성과를 발판삼아 다른 진화론 관련 내용의 개정도 청원할 계획이다. 결국은 “진화론을 정설로 가르치는 교육제도를 바꾸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외부 반응 싸늘… 진화론 대응 방식에 변화 필요

헌데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기독교가 또 한 번 근본주의적 입장을 강요한다”거나 “신화나 믿음, 종교적 차원의 것을 자꾸 과학화하려 한다”는 등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것이 기독교 친화적인 정권 때문이라는, 다소 억지스런 주장도 있었다. 심지어 교과서 출판사들조차 “시끄러워 지는 것이 두려워” 할 수 없이 내용을 개정했다는 언론보도까지 있었다.

물론 이런 반응들은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실추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근거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창조론 對 진화론’의 대결국면이 과연 창조론 이해에 긍정적이냐는 물음은 교진추를 위시한 일련의 기독교 단체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지적이다.

한 창조론 학자는 “일부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에 대항하기 위해 창조론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창조의 증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하거나 진화론의 과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식”이라며 “그러나 이런 일대일의 대응, 혹은 부분적 접근은 오히려 창조론 이해에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창조는 과학을 넘어선 믿음과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마디로 지혜와 전략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전투적 방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과학 교과서에 대한 것도 (진화론 관련 내용 중) 이게 틀렸다, 저게 틀렸다 같은 각론적 대처론 끝이 없다. 일부분 개정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론 진화론 자체에 대한 인식 개선을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과학적 진화론’보다 ‘진화론적 사고’가 더 큰 문제

▲지적설계와 진화론의 논쟁을 다룬, 과거 미국 타임지 표지.
매년 ‘창조론 오픈포럼’을 개최하고 있는 조덕영 박사는 진화론 문제가 단순 과학적 부문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진화론적 사고’가 그것인데 과학의 ‘생물학적 진화론’도 알고보면 이 진화론적 사고에 기인한다는 게 조 박사의 분석이다.

조 박사는 “기독교계가 과학적 진화론에만 관심을 둘 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오늘날 만연한 진화론적 사고를 간파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로 인해 우연주의와 같은 신념이 공고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인류도, 그리고 이 사회도 결국은 진화에 의한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에선 하나님도, 그리고 인간과 이 세상을 지으신 그 분의 뜻도 자리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오성현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역시 “진화론은 진화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과학을 넘어 가치관적 접근 혹은 종교적 접근을 요구한다”며 “진화론은 이미 근대적인 합리성을 넘어 영성 내지 종교성을 갈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했다.

오 교수는 “오늘날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인 토론 주제인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을 넘어서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미 진화론이 사회적 가치관과 결합하고 있는 것”이라며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창조론 대 진화론이 아닌, 윤리적·종교적·사회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