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금희는---? 신애는 잠간 금희에게 가볼 생각을 한다. 해방이 되고 개학을 하여 한글을 배우고 있는 데도 금희는 학교엘 오지 않고 있었다. 금희의 무용가의 꿈은, 경성에 가서 식모살이를 해서라도 무용학교에 가겠다던 금희의 독한 포부는---? 여린 신애의 마음은 애잔해 진다.

엄마는 과수원지기가 사는 양철집 안팎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계속 사과도둑이 들다니, 아까운 마음에 앞서 무서운 생각이 성큼 다가섰던 것이다. 아버지가 부재중이라 엄마의 무섬증이 더 드는 지도 모른다. 사흘을 내린 눈은 발걸음을 뗄 적마다 빠드득 빠드득 소리를 내었고, 겨울장화를 신은 신애의 정강이까지 푹석푹석 빠졌다.

앞서 가던 신애가 소리쳤다. 부엌 뒷문 굴뚝 옆에 사람의 발자국이 패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발자국은 광 앞에도 나 있었다. 놀란 눈으로 엄마가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엌 뒤쪽으로는 사람의 발자국은 고사하고 짐승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국은 전혀 없었다.

엄마가 헛간에서 눈치는 넉가래를 꺼내다 눈길을 내며 밀어나갔다. 얼마 안가서 엄마는 사람의 신발자국이 나 있는 걸 발견하였다. 발자국은 광으로부터 과수원 뒷산 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참 이상도 하지, 사과도둑놈이 뒷산으로 튀었나?

엄마가 신애를 보며 혼자소리를 하였다.

아마, 먹을 게 떨어진 설봉산의 문둥이가 내려왔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 아무튼 신애야, 발자국이 있는 데까지 가 보자.

놀란 까치 몇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도토리나무의 눈을 털면서 산 위쪽으로 날아갔다. 신애는 엄마를 따라 빨갛게 언 뺨으로 뒷동산의 입구를 지나 경사진 언덕배기까지 올라갔다. 그렇게나 눈밭에 패인 발자국은 길게 나 있었다. 앞에서 눈길을 내며 넉가래를 밀고 가던 엄마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숨어있던 땅굴 앞에 멈춰서 있었다. 발자국은 바로 그 땅굴 앞에서 끊겨 있었다. 재빨리 앞 쪽을 둘러보고 온 신애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여기야, 여기가 발자국이 난 끝이에요!

엄마도 신애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땅굴 주위를 돌며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발자국이 더 난 곳은 없었다. 바로 발자국의 종착지는 이시가와를 피해 지난 해 여름, 아버지가 숨어 지내시던 땅굴 앞이었다.

문둥이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엄동설한에 이 허술한 땅굴에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쫓기는 중죄인일지라도.

순간, 엄마는 땅굴 속으로 들어가 볼 용기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결단한다. 사과쯤 도둑맞았기로서니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다. 오늘 사과를 다 실어냈으므로 더는 도둑맞을 게 없을 뿐더러, 이 속에 꼭 사과도둑이 있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또 거지든 문둥이든 있다고 한들 어쩔 것인가. 눈이 큰 엄마는 땅굴 속에서 뭐가 벌컥 튀어 나올 가봐 더럭 겁이 나서 얼른 뒤돌아서고 말았다. 엄마 뒤를 따라 신애가 몇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을 넘어가는 바람 소리에 섞여 우우욱 우욱욱 쿡쿡---.하는 짐승 우는 소리가 놀란 신애의 뒷덜미를 잡아채었다. 기겁을 하는 신애의 소리에 엄마가 쫓아왔다.

우우욱 우우욱- 구륵 구륵 꾸르륵---.

왈칵 소름이 돋는 괴성은 아버지가 숨어 있던 땅굴 속에서 들려나왔다. 잠깐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인 엄마는 한 손으로 넉가래를 뒤로 끌며 신애의 손을 잡고 황급히 과수원지기 네 집으로 내려갔다.

순사를 불러와야겠다.

땅굴 속을 들여다보기는커녕 입구의 가마니때기를 들쳐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엄마는 과수원지기가 없어 직접 순사를 부르러 갈밖엔 없었다. 공포감에 쫓겨 엄마와 신애가 발걸음에 바퀴 달린 듯이 막 과수원입구를 나서는데, 때마침 여주에 갔던 과수원지기 마누라 여주댁이 과수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가움에 겨운 엄마는 수더분한 과수원지기 마누라의 담요장갑 낀 손을 덥석 잡으며 여주댁! 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엄마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과수원지기 마누라의 손을 잡고 더듬거렸다.

허씨는, 요-?

여주댁이 미안한 얼굴로 변명하려는 말을 듣고 있을 겨를이 없는 엄마는. 왜, 여주댁 혼자 와요? 허씨는, 요?

그 양반은 소피를 본다구 했어유. 저기 오는구먼유.

과수원지기가 엄마를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미안해하는 그의 말을 손사래로 끊고 엄마는 그들 양주를 데리고 급히 땅굴로 올라갔다. 땅굴 앞에 서자 아까는 우우욱 거리던 괴성이 지금은 끄응 끙끙 숨 끊어질 듯이 앓는 신음소리로 바뀌어있었다.

과수원지기가 애꾸눈을 껌벅이며 두루마기를 벗어 마누라에게 주고는 용기를 내어 땅굴 입구를 덮은 가마니때기를 확 들쳤다. 그리곤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냐? 엉! 거기 누구냐?

땅굴 속에선 사람의 말 대신 울부짖는 짐승의 괴성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병든 짐승인 갑네유.

과수원지기는 굵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땅굴 입구를 탕, 탕, 탕, 쳤다. 역시 끙끙거리고 꾸륵꾸륵거리는 괴성이 들려올 뿐 사람의 말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자기 직책을 알아챈 과수원지기가 미간에 내천 자(川)를 긋고는 굵은 소나무가지를 무기삼아 땅굴 속으로 들어가 볼 용기를 내었다. 엉금엉금 과수원지기가 땅굴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대뜸 시궁창 썩는 내가 코를 싸쥐고 말았다.

어이쿠쿠쿠우---.

여차하면 내리치려고 몽둥이를 높이 쳐든 과수원지기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뒤로 물러섰다. 넝마로 싼 짐짝처럼 뒹구는 물체는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다. 해골처럼 마른 얼굴은 머리와 수염이 자랄 대로 자라 활동사진에서 본 귀신같은 몰골이었다.

허억 헉헉 헉허허---.

내다버린 짐짝 같은 물체는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계속 고통에 짓눌린 신음을 뱉어내었다. 곧 숨이 끊길 듯 고통에 찬 몸부림을 쳐대었다. 눈의 초점을 잃은 혼미한 상태였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 하였다.

과수원지기가 다시 외마디 소리를 지른 건 발치에 먹다 버린 사과 껍질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걸 발견하고서였다. 그 쓰레기는 오랫동안 부패하면서 단말마적인 신음을 토해내는 괴물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섞여 극심한 악취를 뿜어내었다.

더 놀랄 일은 마누라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다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중얼거리던 주전자와 식칼이 찌그러진 양재기 옆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오--카상. 음 오카--상. 음--음--.
칵- 칵- 음-음-.오 카 상---.칵 칵-.

꼭 숨 끊어지기 직전의 병든 짐승이 내지르는 단말마적인 비명소리였다. 이미 극도의 고통을 넘어선 신음소리는 끊길 듯 끊길 듯, 하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체수가 작은 과수원지기가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신음하는 괴물을 굴 밖으로 끌어내었다. 작은 키의 과수원지기가 괴물을 간신히 들쳐 업고는 끙끙 동산을 내려갔다.

도둑놈은 아닌 거 같구, 병든 문둥이 아녜유?

마누라가 그렇게 물었으나, 힘에 부치는 과수원지기는 된 숨을 내쉬며 짐짝을 부리듯 지고 온 걸 마루에다 털썩 부려놓았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흉물을 들여다보던 엄마는 아이쿠! 헉 헉! 하고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