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내리던 눈은 날이 밝으면서 그쳐주었다.

눈 온 이튿날은 문둥이가 빨래해 입는 날이라고 하신 할머니 말이 생각나서 신애는 미소가 나왔다. 바람도 자고 정말 푸근한 겨울날씨였다.

엄마는 은애에게 감춰 두었던 눈깔사탕이며 부채과자를 꺼내주고 두 동생을 잘 보라고 엄하게 일렀다. 특히 세 살짜리 사내동생이 윗목에 철망을 쳐 놓은 화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한눈팔지 말고 잘 지켜봐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타이르고 당부하였다.

아버지가 작년에 경성에 가셨을 때 화신백화점에서 사다주신 빨간 오바(코트)를 입은 신애에게 엄마가 짠 빨간 벙어리장갑과 같은 실로 짠 털목도리를 칭칭 둘러 주었다. 외로운 엄마는 유난히 추위를 타는 신애에게 옷을 잔뜩 입혀서 데리고 장터로 나갔다.

신애가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 다섯 살 때쯤부터였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동그랗고 다소곳한 신애를 데리고 다니는 걸 엄마는 좋아하였다. 수원 외할머니 댁에 갈 때는 물론이고 일요일 날 예배당에 갈 때도, 닷새 장을 보러 나갈 때도, 엄마는 늘 어린 신애의 손을 잡고 다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고 있는 지금, 엄마에게는 어리지만 맏딸인 신애만이 위로가 되는 말상대인 것이었다.

엄마 혼자 갔다 오는 건데. 신애야, 춥지?
힘없는 음성으로 엄마가 물었다.
괜찮아 엄마. 나, 조금밖에 안 추워.

엄마의 손을 장갑 낀 손으로 꼭 쥐며 영리한 신애가 말했다.

이 추운 날씨에 감기 잘 드는 널 과수원에 데려가는 게 아닌데. 신애야 발 시리지? 아버지한테 야단맞을 짓을 엄마가 하고 있구나---?

엄마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이유를 아는 신애는 엄마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나, 괜찮아 엄마. 융 바지 두 개 입고 큰엄마가 사주신 털 장화 속에 솜버선 신었는데, 나 발 안 시려, 엄마.

쓸쓸한 엄마의 마음을 아는 신애는 맑은 목소리로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장터에 지게꾼은 눈에 띄지를 않는다. 닷새장날도 아닌데다가 눈 쌓인 엄동설한의 장터는 을씨년스럽고 휑하게 비다시피 했다.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간신히 객주 집 굴뚝 옆에 웅크리고 있는 나이 어린 지게꾼을 발견하게 되었다. 금호였다.

신애는 금호가 알아볼까봐서 얼른 고개를 돌리고 엄마 뒤로 가서 얼굴을 숨기었다. 낡은 토끼털 귀 가리개 모자를 쓰고 있는 그는 징용에도 끌려가지 않을 어린나이였다. 누가 입던 것인지, 헐렁하고 낡은 밤색 양복 윗도리에, 바지는 서너 군데나 헝겊을 덧대어 기운 검정 무명 솜바지가 발목위로 껑충했다. 몇 년 새 옷은 더 낡고 금호의 키는 더 자란 것이리라.

엄마는 으르르 떠는 지게꾼이 금희의 오빠인 줄 모른다. 신애와 같은 반 친구인 금희는 본 적이 있어도 또 금희에게 오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엄마가 금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짐삯을 묻는 엄마에게 허기진 목소리로 금호가 말했다.

알아서 주세유, 아주머니.

엄마는 안쓰러운 눈길로 닳고 닳아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온 지게꾼의 까만 고무신 발을 내려다보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안된 마음을 꿀떡 삼키고 엄마는 나이 어린 지게꾼을 데리고 과수원을 향해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갔다.

신애는 더는 금호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기운 없어 보이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엄마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 신애에겐 전혀 관심 없어 했던 것이다.
 

엄마의 가지색 모본단 두루마기 주머니 속에 장갑 낀 손을 넣고 종종 걸음을 치는 신애의 두 뺨과 코끝은 산타 인형처럼 새빨갛게 얼었다. 온천을 지나고 변전소 앞을 지날 때, 신애는 이시가와를 만났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아버지는 이시가와에게 잡혀갔고, 그 비 쏟아지는 다음 날, 엄마는 그놈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아주 나쁜 일본 놈. 악랄하고 도깨비 같은 일본 놈!

그는 가즈오의 삼촌이었다. 그러니까 가즈오도 이시가와와 같은 일본 놈인 것이었다. 일본아이인 그 가즈오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나라로 가기는 한 걸까. 고베라고 한 자기의 집으로---?

새다리(鳥橋)에 이를 때까지 인적이 드문 길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발목을 넘는 눈은 발걸음을 떼어 놓을 적마다 빠삭빠삭 소리를 내었다. 마침내 황량하게 빈 수수밭을 휘돌아 과수원 초입에 다다랐다. 적막한 나목 밭이 된 과수원의 설경은 딴 세상처럼 신비하였다. 화가가 그린 한 폭의 간결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수채화 같았다.

겨울 사과나무 가지 위에 눈송이가 얼어붙어서 하얀 동화 속의 그림처럼 행복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박하사탕을 문 것 같은 신애의 눈은 한껏 크게 열리어 엄마가 부를 때까지 추위도 잊고 서있었다. 먼 겨울나라에 온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에 눈을 박고 서있었다.

산새 몇 마리가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늘까지도 좍 새하얀 비단을 펼쳐놓은 듯, 온통 과수원은 새하얀 세상이었다. 쓸쓸한 엄마와 신애의 침울한 기분을 하얗게 표백해 주는 한없이 평화스러운 풍경이었다.

엄마를 본 진돌이가 기둥에 매인 철사 줄이 끊어져라 겅중겅중 뛰어오르고 뱅글뱅글 돌며 어쩔 줄 모른다. 반가워 펄펄 뛰는 진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엄마가 얼어붙은 개밥그릇을 보고는 어-휴, 이런, 이런, 하고 찰찰 혀를 찼다.

엄마가 정지로 가서 가마솥을 열어보았으나 밥은 없고 대소쿠리에 찐 고구마가 몇 알 있어 그거라도 개밥그릇에 넣어주었다.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덩치 큰 진돌이를 이윽히 보고난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과수원지기 양주는 요즘처럼 한철엔 딸이 사는 여주엘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한다.

엄마는 먼저 과일을 저장해 두는 지하실의 광으로 가보았다. 사과를 저장한 대형 항아리가 반 넘어 비어있었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축이 나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주변머리라곤 요만큼도 없는 애꾸눈 과수원지기가 들어냈다고는 엄마는 생각지 않는다. 이십여 년 넘도록 그들은 바보로 여겨질 만큼 정직한 아둔패기였다.

나들이라곤 당공 여주에 사는 딸 네 뿐이고, 갈 적마다 사과 몇 개, 복숭아 몇 알 가지고 가는 것도 그냥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번번이 허락을 받고는 했다.

그런데 올 적마다 사과 저장항아리가 비는 게, 엄마로서는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엄마가 나이 어린 지게꾼에게 사과 몇 개를 집어주자, 허기진 금호는 돌아서서 진돌이가 찐 고구마를 먹어치우던 것처럼 단박에 먹어버렸다.

이 사과 가마니를 사거리에 있는 약방으로 져다주게.

번화가에 있는 약방이 찾기도 수월하고 가까우니까 어린 지게꾼의 힘을 덜어주기 위한 엄마의 배려였다. 지게 품삯을 후히 주고 난 엄마가 그에게 따로 양회포대에 사과를 넉넉히 담아주었다.

추운데 고생이구먼. 이건 식구들하고 같이 먹게.

선한 눈매에 잠간 밝은 웃음기를 보인 소년지게꾼은 끙, 하고 된소리를 내며 사과가마니를 졌다. 해진 고무신발로 눈 쌓인 눈길을 힘겹게 밟으며 금호가 과수원을 나가는 모습을 신애는 동정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