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때였다. 모든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리어 계속 잠 만 자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묵시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학생은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면서 밤늦게 일하고 부족한 잠을 학교에 와서 보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형편은 고3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공교롭게도 그 학생이 있는 학급의 영어수업을 맡게 된 것이다.

첫 수업 시간에 들어가니 여전히 학생은 엎드리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책상 위에는 예쁘게 디자인한 종이에 무언가 적어서 모양 있게 붙여놓고 있었다. 나는 깊이 잠든 학생의 팔을 옆으로 밀치면서 양해를 구하고 글을 읽어 보았다. 놀라운 내용이었다. 누구의 말을 퍼온 것인지는 밝혀놓지 않았는데 “오늘 이 하루는 어제 먼저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날이다” 라는 글귀였다.

안타까운 맘이 들어 수업시간 내내 맘이 무거웠고 내 고민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두 번째 수업시간에 나는 교과서와 관계없는 학습 내용을 준비하여 학생의 숫자만큼 인쇄를 해서 가지고 들어가 맨 먼저 잠든 학생의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학생은 눈을 부비고 유인물을 받더니 내용은 상관없다는 듯 밀쳐두고 다시 엎드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학생을 일으켜 세우고 말을 걸었다. 먼저 유인물의 제목을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론 나는 그의 등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존칭어를 써서 물어보았다.

인쇄물의 제목은 ‘Make Each Day Your Masterpiece’였는데 학생은 띄엄띄엄 Make Each Day Your… 하고 읽다 ‘Masterpiece’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영어여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 한글로 쓰여진 네 책상의 글귀를 읽어보고 뜻을 말해 줄 수 있겠니, 왜 이 글귀를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것이니?“ 라고 나는 다시 말을 걸면서 다정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스런 몸짓으로 내 눈을 피했다. “예, 이 글은 오늘 하루가 살아있는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대답이었다. “그래, 살아있음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살아있는 이 시간에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니? 학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래, 오늘은 책상에서 일나 너가 읽은 영어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문제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니? 나는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날 한 시간 내내 학생은 졸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나의 말에 반응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가 영어로 된 문장을 읽을 을 수 있었다거나 그 뜻을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를 할 때 학생은 무섭게 집중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나는 흥분되어 그야말로 선생처럼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본문의 하루를 순간이란 단어로 바꾸고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 먼 후일 학생들 스스로의 모습인 점을 강조했을 것이고,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학생은 다른 어떤 일보다 학업을 비롯한 학교생활 의 책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 분명 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어느 스승의 날 즈음에 편지 한 통을 등기로 받았다. 이멜이나 문자가 기존의 편지를 대신하고 어쩌다 우편으로 받는 편지봉투들은 대부분 그렇고 그런 내용의 알림장이다. 그런데 정성스런 글씨로 주소를 적고 우표에 날짜가 찍혀 온 편지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발신인 주소를 보니 S기업 한 부서로 되어있고 이름 옆에는 괄호를 치고 토목과 몇 회라고 적혀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봉투를 뜯었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겠는지요.”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그 학생의 얼굴을 떠올렸고 반가운 맘으로, 그리고 들뜬 기분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는 졸업을 한 후 유흥업소에서 밤새워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벽돌을 만드는 한 기업체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그 해에 정식 직원이 되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온 것이다. 물론 꾸준히 영어공부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가 정식 직원으로 채용이 되기까지 어떻게 일을 하였는지 나는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님 저는 정식 직원으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에 진정성을 가지고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면 분명코 정식직원으로 채용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그날 Make each day your masterpiece를 공부하던 날, 제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 문장만은 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강제로(?) 제 약속을 받아내셨지요?

제가 지금은 그 부분을 암기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기억하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길 해 주지요. 그날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그 분노에 찬 듯한 억양을 그대로 흉내내면서요.” 그는 ‘강제로’ 라는 단어와 ‘분노에 찬 억양’이라는 말에 밑줄까지 그어놓고 물음표를 몇 개씩 찍어놓았다. 나는 글의 행간에서 그의 마음을 읽었고 가슴이 짠해져 눈물이 나려했다.

학생의 편지를 들고 나는 서재로 들어왔다. 그리고 학생에게 강요했던(?) 암기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계속>.

/송영옥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학대학교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