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아버지에게선 엽서 한 장 오지 않는다. 고단한 밤 엄마가 한 땀씩 수놓은 일곱 개의 무운장구 센닌바리는 아버지 방 책상 위에 압핀으로 붙어 있다. 볼 때마다 신애는 엄마의 간절하고 고독한 마음이 느껴져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할머니가 몸져 누우셨다. 큰아버지가 구금된 때문이다. 아버지가 징용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일본에 붙어 협력한 친일파들은 자기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어떤 구실로든 동포들에게 해를 입힌 배신자들이었다. 동정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큰아버지 구속사건은 돈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백 년 화평성대를 누릴 줄 알았던 큰아버지의 작은 부인은 얼굴에 분가루를 쓰고 구명운동을 위해 경찰서 출입이 잦다. 미인계를 쓸 작정인 모양이었지만, 그런 농간이 통할 리 없는 딴 세상인 걸 제멋대로인 그녀는 깨닫지 못하였다. 결국 큰아버지는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던 것이다.

큰아버지의 구속 사건으로 할머니와 큰엄마의 시름은 엄마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치었다. 위로하고 위안을 받던 처지에서 엄마는 큰엄마를 위로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일각일각 초조하게 아버지를 기다리는 엄마의 불안은 매일 밤, 엄마의 잠을 앗아가고 얼굴에 검은 수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언제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신애의 발걸음은 빠르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에 바퀴가 달린 때문이었다. “엄마!” 하며 대문을 들어서는 신애에게 뜻밖에도 빵떡모자 아저씨가 반가운 손짓을 하신다.

“아저씨, 오셨어요?”

신애는 허리 굽혀 반가운 인사를 한다.

“우리 신애, 많이 컸구나.”

석양빛을 받아 복사꽃이 분홍색 비단을 좍 펼쳐놓은 듯 화사하던 봄날, 과수원에 피신해 있던 신문기자 아저씨. 아버지와 라디오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전쟁이야기를 하고 장기를 두곤 하시던 고진의 아저씨. 일본에서 제일 어려운 법대를 다니고 경성에서 제일 큰 신문사의 기자라고 아버지가 자랑하시며 아버지와 제일 친한 아버지의 친구 분이었다. 엄마처럼 신애도 아버지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움에 겨워 연신 웃는 얼굴이 되었다. 신애에게 신문기자의 원대한 꿈을 심어 준 아저씨는 해방이 되어 살맛나는 세상이라고 실눈으로 담뿍 웃으신다.

“신애야, 요즘 학교에선 무얼 배우고 있니? 아직 조선말 책이 없지?”

아저씨가 물으시었다.

“ㄱㄴㄷ 이랑 ㅏㅑㅓㅕ를 배워요.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셔서 한글을 읽을 줄 알아요.”

“일본시대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신문기자가 되려면 대학교에도 가야하니까.” 격려를 하시며 아저씨는 기특하여 신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네, 아저씨.” 신애는 기쁜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고진의 아저씨와 이야기하는 엄마도 모처럼 큰 웃음을 보이곤 한다. 신애도 연신 기쁜 미소를 짓는다. 곧 아버지가 계실 때처럼 부엌에서 맛있는 도마 소리가 들리고 북엇국 냄새가 구수하게 풍겼다. 시금치와 숙주나물을 무치고 아버지 상에만 오르는 더덕장아찌도 상에 올랐다.

아저씨는 시골 부모님이 중학생 때 강요한 조혼을 파기하고 경성에서 혼자 신문기자 생활을 하신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빙 둘러앉은 가정적인 분위기의 행복한 식탁을 맞는다며 아저씨는 퍽 즐거워하시었다.

“참으로 순일은 행복하군요. 행복한 그 친구는 곧 올 겁니다. 아마 지금쯤 부산항에 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올라가는 대로 알아보겠습니다. 동경 유학 때 학도병에 끌려가다가도 도중에 병을 과장해서 빠져나온, 운 좋은 친구 아닙니까. 핫핫하아….” 신애는 아저씨의 근심주머니가 터지는 것 같은 핫핫하… 하고 웃으시는 그 웃음소리가 참 좋다. 아저씨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일시에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유쾌한 기분이 든다. 비구름이 걷히고 하늘에 쌍무지개가 떠오르듯이.

고진의 아저씨는 다음날 첫 기차로 떠나셨다. 신애는 엄마를 따라 아저씨를 배웅하러 역으로 나갔다. 기차역엔 코스모스가 초가을 새벽바람에 비단결처럼 하르르 물결치고 키 큰 해바라기 꽃은 노란 화판 속에 새까맣게 영근 꽃씨를 잔뜩 배고 있다. 아버지의 방에서 주무신 아저씨는 일곱 개의 센닌바리 수건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부러운 어조로 말하신다.

“신애 어머니의 그만한 정성이면, 아마도 그 친군 죽었다가도 살아올 겁니다. 안심하세요.”

“바쁘신 중에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는 일본여자처럼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순일이 하고는 친형제보다 더한 사이인데요. 신애야, 내년 봄방학 때 아버지 어머니랑 경성에 오너라. 장차 조선의 여자 신문기자 지망생이니, 아저씨 다니는 신문사를 견학하는 것도 유익할 테니까.”

아버지와 함께 오라는 말에 신애는 높푸른 희망을 마음속에 아로새기었다. 힘찬 기적소리를 울리며 도착한 기차에 오르기 전 아저씨가 사양할 틈도 없이 신애 손에 두툼한 봉투를 쥐어주었다.

고진의 아저씨가 탄 기차는 뭉게구름 같은 수증기를 내뿜기 시작하고, 힘차게 소리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속도를 내며 기차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갔다. 점차 까만 점으로 보이던 기차가 이제는 그 꼬리마저 보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황량한 들판 같은 엄마의 가슴에 희망의 여운을 긋고.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