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남양 군도나, 아마도 그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그럼, 선생님도 조헤이에 나가시는 거예요?”
“그렇다. 전황이 매우 위급한 모양이라고 하니까.”
“선생님은 일본인인데 징병에 가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남양군도는 말라리아랑 너무 멀고 위험한 곳이에요.”

“천황폐하의 명령이다. 쇼아이 너, 선생님이 엽서 보내면 곧장 답장을 써야 한다.”
“네, 선생님.”

신애는 슬픈 마음이 되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었다. 신애가 열이 있어 안 되겠다며 구니모도 선생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끌러서 신애에게 내어밀었다.

“조금 클지 모르지만 곧 중학생이 되면, 그때 차고 다니도록.”

까만 가죽 줄에 노란 금딱지인 세이코 시계는 타원형이어서 꼭 남자용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모양새였다. 사양하기에는 그의 눈빛이 진지하고, 예상 못한 작별이 막막하여 신애는 두 손으로 시계를 받아들었다. 마지막…, 영영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나쁜 일본의 좋은 선생님.

“신애, 모쪼록 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조선의 여자 신문기자의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거다. 부디 건강해라.”
“네, 선생님.”
“자- 사요나라-.”
“사요나라. 구니모도 센세이.(안녕히 가세요. 구니모도 선생님)”

그가 언덕을 내려가 가즈오네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신애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본인에게 당하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그는 유일하게 아버지도 인정하시는 침략자인 일본의 훌륭한 선생이었다.

누구하고든, 헤어진다는 건 너무 마음 아픈 일이라는 걸 신애는 처음 알게 되었다. 슬픈 마음이 되어 집으로 들어간 신애는 아버지가 징집명단에 중환자로 기재되었다는 것과 구니모도 선생님이 내일 조헤이로 떠난다고 보고하였다.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쉰 엄마는 울분을 품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선생이야 자기 나라 전쟁을 위해 가는 거니까 남양군도 아니라 시베리아 눈벌판엘 가도 상관없지만, 무슨 원수로 그놈들이 우리 조선 남자들을 총알받이로 끌어간단 말이냐?”

엄마가 마음속으로 죽죽 울고 있다는 걸 신애는 안다. 엄마의 원한과 울분에 찬 속울음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영영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해도 가슴 속의 분한을 쏟고 쏟아 내어도 그 치 떨리는 오욕을 씻어낼 수 없으리라는 걸.

신애는 모처럼 뒤꼍의 오동나무에 매단 그네에 몸을 살살 흔들리며 반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네에 몸을 흔들리우며 호젓이 가즈오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할아버지 산소에서 넷이서 놀고 있을 때였다. 가즈오가 신애에게 달려드는 벌을 소나무가지로 쫓아주는 걸 진자가 샘을 내었다.

“벌이 뭐가 무섭다고 신애는 앙앙거리는 거야? 넌 바보야?”
“난 유치원 다닐 때 원족 가서 벌에게 얼굴을 쏘였단 말이야.”

신애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러자 심술궂은 진자가 뾰족한 목소리로 공격을 가했다.

“내 동생 선자는 벌에 쏘였어도 울지 않는데, 넌 선자보다 한 살 많은데 벌이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앵앵거리니?”

하얀 레이스 간단후꾸를 입은 진자가 심술을 부리며 손에 든 할미꽃을 내던지자 게이코는 도라지꽃을 가즈오에게 확 던졌다. 신애에게 친절한 가즈오에게 골이 난 진자는 가즈오의 동생인 심술쟁이 게이코의 손을 잡아끌고 쌩 달아나버렸다.

진자는 언제나처럼 가즈오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가즈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신애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걸로 표현하곤 하였다. 가즈오와 신애는 개의치 않고 계속 할미꽃을 열심히 땄다.

세 기基가 있는 신애네 할아버지 묘 주위엔 비로드 같은 자주색 꽃잎 뒤로 하얀 잔털이 보슬보슬한 할미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가즈오는 할미꽃으로 족두리와 목걸이를 만들었다. 하얀 토끼풀꽃으로는 팔찌와 반지를 만들었다. 정말 가즈오는 손재주가 있다.

가즈오가 할미꽃 목걸이를 신애 목에 걸어주고 하얀 토끼풀 꽃으로 만든 반지와 팔찌를 손가락과 손목에 껴주었다. 할미꽃과 토끼풀 꽃을 섞어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씌워 주고 나서 가즈오가 말했다.

“쇼아이, 참 예쁘다. 신부처럼 예쁘다!”
“신부가 뭐야…?”

신애가 물었다.

“신부는 결혼하는 여자야. … 너는 내 신부야.”

가즈오가 의젓하게 말하였다.

“나는… 가즈오하고 결혼해?”
“그래, 나하고 결혼하는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신애가 말했다.

“결혼을 해…? 결혼을 어떻게 하는데?”

신애의 눈에 호기심의 광채가 일었다. 결혼이 무언지 알기에는 갓 일곱 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서양식 결혼식을 본 적도 없었다. 가즈오는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지금 결혼하자!”
“나는, 신부야…?”
“목걸이랑 반지랑 다 꼈잖아…. 신부는 그렇게 머리에 화관(족두리)도 쓰는 거야.”

소학교 1학년인 신애보다 두 학년 위인 가즈오는 신애에게 눈을 꼭 감게 하였다. 그리곤 신애의 양 볼에 도장을 찍듯이 건조한 자기 입술을 한 번씩 콕콕 찍었다. 그러고 나서 파란 반바지 허리로 빠끔히 내민 신애의 배꼽에 또르르 오줌 한 방울을 떨어뜨리었다. 마지막으로 신애의 앵두만한 입술에 자기 입술을 콕 찍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결혼했으니까, 신애는 내 신부야! 아주 영원히…”
“영원히, 가, 뭐야…?”
“이다음 이다음까지. 아주 이다음까지. 오래도록…”

조그만 봉숭아 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신애는 생각한다. 내일 가즈오를 만나러 가 봐야지….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