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다시 오라고 했던 이시가와는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하여 매일같이 엄마는 날이 새기 무섭게 군청으로 쫓아가곤 했다. 그러나 이시가와는 딴 사람이 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내가 언제 무슨 약속을 한 적 있느냐고 칼로 자르듯 계속 딴 말만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밤.

기적처럼 아버지는 각혈이 심해지셔서 짐수레에 실려 나왔다. 엄마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였다.

신애는 알고 있다. 임신한 몸으로 이시가와에게 당한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배신감은 결코 엄마 자신이 치러내야 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대가라는 것을.

비 개인 날씨는 더없이 쾌청하였다.

하늘은 말간 얼굴로 연일 한여름의 땡볕을 내리쏟아 부었다. 할머니의 요청으로 하루걸러 의사의 왕진을 받는 아버지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큰어머니가 잣죽을 들고 다녀가신 후 구니모도 선생님이 집으로 신애를 찾아왔다. 그는 정중히 엄마에게 인사하고 신애를 데리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뒷동산으로 갔다.

비스듬한 주위로 할미꽃들이 달무리처럼 띠를 두르고 있는 산소 아래의 드넓은 밭에는 보라색의 도라지꽃이 잔물결 치는 바다인 양 펼쳐져 있다.

동산의 울창한 숲은 나무그늘이 넉넉하여 시원하였다. 가지가 풍성한 떡갈나무 아래에 앉자, 구니모도 선생님이 위로의 말을 꺼내었다.

“확인해 보았는데, 너의 아버지는 중환자라는 진단서가 징집명단에 첨부돼 있더구나. 이제 너의 아버지의 조헤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도한 마음이 들어 감사의 표시로 신애는 깊이 머리 숙여 두 번 세 번, 일본식의 절을 하였다.

그가 천천히 말하였다.

“나는 일본인이니까 언제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너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지 않으면 공부도, 성취하고 싶은 꿈과 희망도, 이루기 어렵다는 걸 알지?”

신애가 고갯짓으로 수긍의 표시를 하자 그가 미소 지어 보이며 신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너, 아직 열이 있구나. 약을 먹었니?”
“네, 의사선생님이 지시해 주신대로 먹었어요.”

신애가 말하자 그가 물었다.

“장차, 너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 거냐?”

신애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해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물었을 때 신애는 나직이 말하였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신문기자가 되는 거예요.”

구니모도 선생님의 눈이 커졌다. 조선의 그것도 경성이 아닌 조그만 소읍에서 신문이 무엇인지도 모를 여자 소학생이 신문기자를……?

아버지가 동경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를 만나러 경성에 가실 때 신애를 데려가 주었었다. 아버지는 진고개(충무로)에 있는 찻집에서 빵떡모자(베레모) 쓴 고진의高進義 아저씨를 만났다.

처음 먹어 보는 오트밀이라는 서양 죽을 먹으며 신애는 고히(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아버지와 빵떡모자 아저씨가 하시는 얘기를 찬찬히 듣고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아저씨가 동경제대 법과 출신의 수재로 경성에서 제일 큰 신문사의 기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해 주셨다.

일본이 일으켰으나, 태평양전쟁은 머지않아 패할 것 같다는 기사를 썼는데, 실리지도 못한 그 기사 때문에 아저씨는 수배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고진의 아저씨는 복사꽃 무리가 새색시의 연분홍 비단치마폭처럼 화사한 신애네 과수원에서 숨어 지내시었다.

조선의 학생이 동경제대 법과에 다닌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친구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한껏 상기되어 행복한 웃음이 연신 넘치었다.

가느스름한 시선으로 찬란한 주황빛 노을을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기침을 하고 나서 술잔을 들고 계신 고진의 아저씨에게 말하셨다.

“내가 혹시 어떻게 되더라도 진의, 자네가 이 애의 진로를 맡아 주게나. 딸애지만 두뇌가 우수하고 나와는 기질이 달라. 자네의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거라고 했더니, 장차 저도 신문기자가 되겠다고 하질 않겠나.”

“자네도 참, 웬, 그런 당치 않는 말을, 어린 여식한테…….”

빙글 웃으시고 고진의 아저씨가 신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신애가 대견하여 말을 많이 하시었다.

“연약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이 아인 일본 외에도 먼 구라파까지 다 가보고 싶어 한다네. 유치원에 다닐 때 화신백화점엘 데려갔더니, 인형을 마다하고 지구의를 집어서 우리 내외를 깜짝 놀래키질 않았겠나.”

신애의 머릿속으로 그날의 묵은 먼 기억이 아득히 떠올랐다.(아버지……)

구니모도 선생님은 백양나무 옆의 바위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이 너럭바위에 누워 얼굴을 밀짚모자로 덮고 짧은 낮잠을 들기도 하시고, 열중한 모습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도 하셨다. 그것이 시詩라는 걸 안 것은 8·15 해방이 되고 몇 년 후, 신애가 S시의 S여자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빨간 왕잠자리들이 헤엄을 치듯이 낮게 날고, 쉴 새 없이 개미들이 신애의 종아리로 기어올랐다. 한참동안 너럭바위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던 구니모도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애, 내일 나는 떠난다. 조선에 와서 너 같은 학생을 만나서 나는 많이 행복했다.”

갑자기 놀라서 신애는 열이 있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물었다.

“선생님, 일본으로 가시나요?”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