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현 목사 설교]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김진영 기자 입력 : 2012.03.03 18:33

날짜: 2012년 2월 26일
본문: 고린도후서 3:1~6
설교: 석기현 목사
제목: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석기현 목사(경향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한 대여섯 살 정도 되던 때, 원로목사님께서 부산의 서면교회에서 사역하고 계셨는데 우리 가족이 살던 사택이 예배당 마당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택 바로 앞에 있던 골목길로 놀러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길모퉁이에 어떤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배원이 자기 어깨에 메고 있던 우편낭 자루를 열어서 꽤 두툼한 우편물 한 묶음을 꺼내더니, 쓰레기통이었는지 아니면 하수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많은 편지들을 몽땅 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편지 배달하기가 귀찮아서 저렇게 하는 모양이지만, 저 편지들을 보낸 사람들과 받게 될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생길까?'하는 생각에 제 딴에는 꽤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편지란 것은 반드시 수신자에게 도달해야 그 목적과 기능이 완수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편지, 절대로 배달사고가 나서는 안 될 편지는 '보통우편' 대신에서 '등기우편'이라든지 '특별속달우편'으로 보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수신자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어떤 편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우체국과 집배원을 통하여서는 부쳐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 편지 수신자가 누구이며, 이 편지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를 이 시간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각 기독신자는 '교역자의 사역'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편지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자천"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자기 자랑'이라는 뜻이지만, 문맥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는 것'이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천거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추천서'(letter of recommendation)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분이나 자격을 제3자가 증명해 주기 위해서 추천서를 써 주는 일은 오늘날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 사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추천서 따위를 너희에게 보내 주어야 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에 고린도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에 난무했던 거짓 교사들이 자기네들의 신분을 위증하기 위해서 가짜 추천서들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신학교 졸업장을 위조해서 목사 안수를 받는 격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남에게 추천서를 써 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과 2절에 나오는 '여집사 뵈뵈'라든지 고린도전서 16장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디모데' 등을 어떤 다른 교회에 파송할 때 바울이 친히 추천서를 써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처음으로 대면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파송된 교회에 가서도 그곳의 교인들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고 또 합당한 영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바울 자신으로 말하자면 그런 추천서가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바울이 스스로 밝히는 그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자체가 바로 바울의 소개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그 교회의 교인들을 복음으로써 거듭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떤 사도이며 어떤 인물인가, 무슨 사명을 받은 사람이며 그것을 지금까지 어떻게 수행해 왔는가 하는 것들은, 고린도교회의 각 교인들의 이마 위에 다 적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추천서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있는 바"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 같은 진짜 사도들은 어디로 가나 그런 추천장을 '편지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써서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천장은 종이에 쓴 것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사도직은 그 진위성과 정당성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라는 아주 특별한 편지를 통하여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목사가 어떤 목회를 했는지는 바로 그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진짜 목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추천서나 이력서나 학력 증명 따위만을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의 무자격과 부적격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정말 목회를 잘하면 그 목사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교인들이 이미 그 목사에 대한 최고의 소개장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 앞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고 사는 표를 내면, 그것이 바로 그 교회의 목사가 삯군이나 이단이 아닌, 진실하고 충성된 주의 사자임을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경향교회의 교육부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교육전도사님들이 과연 어떻게 사역을 하고 있는지는 제가 일일이 해당 교육부의 교사들에게 여론조사 따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SFC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주일성수와 헌금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그것만 보면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부목사님들과 여전도사님들이 전도자로서 정말 열성을 다해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는 무슨 통계숫자를 가지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해당 교구 성도들이 새벽기도 특송 때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주일마다 얼마나 많은 새신자들을 전도해 오는지, 교구헌신예배를 드릴 때에 얼마나 정성스러운 특별예물들을 바치는지 이런 것들만 보아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 역시 텔레비전을 통하여 매주일 방영되고 있지만, 저의 목회에 대한 진짜 평가표는 그 방송설교의 시청률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경향교회에 몸담고 있는 각 성도들의 말과 행실을 통해서 가장 정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경향교회가 어떤 교회냐?'하는 것은 제 얼굴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의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하여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에게 우리 경향교회를 소개해 주는 대표는 제가 아니라 바로 경향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바로 목사의 소개장이며 우리 교회의 얼굴임을 기억하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누리고 있는 신앙생활의 기쁨과 축복을 자랑하면서 전도하는 '특별한 편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각 기독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편지입니다.

3절 말씀에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신자가 단지 자기 교회와 목사를 소개하는 편지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구원 은혜를 알려 주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참된 성자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인의 구세주가 되심을 땅끝까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자면 '너희는 우리가 직접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이마 따위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직접 글을 썼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런 편지에는 아주 특별한 필기도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연필'이나 '펜'이 아닌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었습니다.
또한 그 편지의 편지지 역시 당시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파피루스'도 아니었고 가장 오래 보존될 수 있었던 "돌비"도 아니라 "육의 심비" 즉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감화감동시켜 주심으로써 사람의 심령에 새겨진 편지는 종이는 물론이요 돌판에 새겨진 것보다도 훨씬 더 잘 보존되는 '영구적인 편지'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신자의 심비에 영구히 새겨지는 편지를 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구체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듣고서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고 그 인격의 중심에 구원의 확신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확실한 중생의 체험을 받은 성도는 그 심령 속에서 변화된 것이 절로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삼국지에서 유래된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사람이 3일만 공부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될 정도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이전에는 지옥의 멸망으로만 치닫던 인생이 천당소망을 얻게 된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그 얼굴빛부터 시작해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전과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처럼 '변화된 중생인의 삶'이 그 어떤 문서나 플래카드보다도 주위의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보이는 '전도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자신의 인격과 생활에 아직 뚜렷이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그 심령에 넘치지 않으면 겉으로 교인 노릇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전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영접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와 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본인이 엿새 동안의 생활을 통하여 '설교를 생활에서 체험'하면서 살지 못하면, '우리 목사님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라고 목사나 교회를 소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편지'는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속에부터 '성령께서 친히 새겨 주신 은혜의 말씀'이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남에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참된 주의 사자를 통하여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본인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신자야말로 불신자들에게는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중생인으로서의 변화된 모습을 자기 이웃 사람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마치 시청각 자료처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문서전도'나 '방송선교'보다도 훨씬 더 감동력 있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새로운 예술 형태 가운데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글, 음악, 그림, 영상물 등을 통해서만 표현되어 왔던 이전의 예술과는 달리 '예술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을 가리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기독신자들은 '행위 전도'(performance evangelism)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문서나 방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전도하거나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앙인다운 '신행일치의 삶'을 불신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면서 전도할 때에 그 효과는 훨씬 더 크고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기쁨과 힘과 은혜와 축복의 체험들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과 생활 속에 새겨 놓고 살아감으로써, '먹'으로 쓴 것보다 더 똑똑하게, '돌비'에 새겨진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빛내고 전파하는 '멋진 편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 신자는 '성령의 감동하시는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새 언약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편지입니다.

4절 이하 6절에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만족"이라고 번역된 말은 '충분'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만족"이란 본인 스스로 느끼는 무슨 '만족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채워 주신 어떤 '충분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바로 '사도로서의 자격이 충분함'을 뜻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4절과 5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격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세움 받은 사도라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 직분을 두고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즉 자기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뭔가 남다른 영력이 있어서 그런 자격을 획득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즉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고 기름 부어 주심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인간적으로만 따져 본다면 도저히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과거, 정말이지 사도가 되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의 사명과 직분에 대하여 그토록 "확신"이 넘치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그 이유를 두고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도 "만족케"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자격 있게'라는 뜻입니다.
즉 "새 언약"에 대한 확신이 바울을 그처럼 사명의식으로 충만케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이루어진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letters)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으려 하는 것은 실상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자처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게 만드는 기능, 그리고 끝까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자에게 사망을 선고하는 역할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죄를 깨달은 자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명 구원은 오직 "새 언약"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된 새 언약,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 가지고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새 언약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으로" 즉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6절 끝에서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한 것도 바로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 이 새 언약을 믿는 것만이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행하고 계시는 이 언약 성취의 역사에 대한 체험과 확신이 먼저 자기 속에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그 새 언약의 복음을 전파하면 자기를 변화시켜 주셨던 바로 그 성령께서 똑같은 감화감동으로 역사해 주실 것 역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성과'만을 자랑하던 당시의 거짓 교사들과 바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내가 잘해서 사람들을 믿게 한다.'라는 자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택자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신다.'라는 확신 가운데 그의 사도직에 대한 사명의식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전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그리스도 피의 새 언약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 얻었음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확실히 믿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하면서도 실상은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만 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참된 자격은 사람 앞에 알려진 '명성'이나 자기 자신의 특별한 '영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화감동하심에 대한 진짜 체험, 바로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사람은 어떤 '매뉴얼'을 좇아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먼저 믿은 신자가 전도할 때에도 역시 자신의 어떤 테크닉이나 노하우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조차 그것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면, 오늘날의 목사나 성도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중생이라는 기적적인 역사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 택자의 심령에 성령으로 도장을 꽉 찍으심으로써 일어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미련한 전도'를 통하여서도 해산신자가 생기게 되는 이유 역시 오로지 성령께서 똑같이 역사해 주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화감동하시는 능력에만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아직도 '죽이는 율법'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처럼 '살리는 새 언약'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편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들 '행운의 편지'라는 것을 한 번쯤은 받아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중학생 시절에 한번 받아 보았는데, 그 소위 '행운의 편지'라는 것이 시작된 계기와 일단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일곱 사람들에게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따위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행운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낸 사람들에게는 어떤 좋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보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슨 나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는가 하는, 거의 위협에 가까운 말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편지를 받고도 다른 사람에게 한 장도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실없는 편지조차 '행운의 편지'니 뭐니 하는 미명을 달아서 부치고 있는데, E메일까지 생긴 요즘에는 아마도 그 편지가 훨씬 더 널리 퍼지고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이야말로 진짜 최고 '행복의 편지'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편지는 그냥 재수 좋으라고 보내는 편지가 아닙니다.
'행운의 편지' 따위에는 결코 없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고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만들어 주는 진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니 정말 이것보다 더 좋은 행복의 편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 편지는 꼭 일곱 장까지 복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심비에다 한번만 새겨 놓으면 평생토록 그 신자를 만나게 되는 사람마다 절로 보고 듣게 되는 편지입니다.
그러니 이 편지가 전달되는 속도는 그 소위 '행운의 편지'라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할 것입니다.
'일곱 장'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하여 날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게 되는 것이니 실로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아 보게 되겠습니까?

기독교가 과연 진짜 종교이며 목사가 전파하는 복음이 과연 진리라는 사실을 제일 잘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편지'된 각 신자들입니다.
이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에게까지 도달해야 할 편지입니다.

목사에게까지만 가서도 안 되고 교인에게까지만 도달하고 그쳐서도 안 되는 편지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편지'의 최종수신 장소는 '땅 끝까지'이며 최종 수신인은 '14만 4천 인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즉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신하신 이 소중한 구령의 복음을 '교회를 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가운데 온 세계 만민에게까지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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