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생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사람들이 간교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렇지만 구니모도 선생님만은 일본 아이 조선 아이 구별 없이 한 곬으로 가르치는 참 교사임을 아버지도 인정하신다고 했다.

절망에 빠진 엄마는 신애만 남기고 동생들을 수원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었다. 할머니가 김해김씨 가문의 가보처럼 여기시는 막내 사내동생까지. 때마침 약혼자의 집이 있는 여주에 갔던 길에 들른 이모의 딸에게 딸려 보냈던 것이다.

열아홉 살인 신애의 이종사촌 언니는 정신대挺身隊를 피하기 위해 얼굴에 검댕 칠을 하고 다니더니, 요즘은 빡빡 남자 머리를 하고 징병 나간 막내 외삼촌의 옷을 입고 다녔다.

올망졸망한 애들 때문에 여간 아프기 전에는 눕는 일이 없는 엄마는 짐짝처럼 쓰러져 앓는다. 신애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였다. 귀에서 아버지의 신음이 들리고 가즈오의 얼굴이랑, 무서운 검은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환각에 휘몰리곤 하였다.

친일파 소리를 듣는 큰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할머니의 재력과 이시가와를 만나 보겠다고 한 구니모도 선생님의 약속이 있다. 그럼에도 몇 차례 고비를 넘긴 지난번 때와는 뭔가 사뭇 다를 것 같은 불안감이 한밤 내내 신애의 잠을 앗아가고 괴롭히었다.

잠이 오지 않을수록 신애는 신경이 뾰족해져서 자주 오줌을 누러 다니었다. 뒷간은 뒤란으로 가는 닭장 옆에 있었다. 밤에 깨어 오줌 누러 다니는 신애를 위해 아버지가 대문 옆 벚꽃나무에 전깃불을 매달아 주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벚꽃나무에 전깃불을 단 직접적인 이유는, 유치원에 다니던 때 뒷간에 간 신애가 대문께의 벚꽃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붙잡고 코알라처럼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애의 몽유병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부모의 애를 태웠다. 더 간 떨어질 일은 달 밝은 밤, 신애가 뒤란에 있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아버지는 다음 날로 우물에다 나무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10미터나 되는 깊은 우물에 긴 펌프를 묻었다. 아버지가 사위가 트인 전망을 좋아하여 손수 설계하여 언덕에 지은 집이기 때문에 평지에 있는 집보다 우물은 두세 배나 깊었다. 물맛 좋기로 동네에 소문난 우물이지만 대신 펌프를 심는 데 엄청난 비용과 인원이 동원되었다.

겨울이면 신애의 밤 오줌은 고단한 엄마에게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엄마는 시집올 때 가져온 오동나무 강화 반닫이와 삼층장이 있는 윗목에다 놋요강을 놓기로 했다.

사고는 요강을 놓은 첫 밤에 일어났다. 신애가 잠결에 요강에다 오줌을 눈다는 게 옆에 있는 질화로에다 누었던 것이다. 화롯불이 사위어 가고 있었다 해도, 가장 여린 신애의 궁둥이 살은 단박에 꽈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특히 오줌 누는 부위로 방울방울 물집이 매달려 오줌을 눌 때마다 쓰라려서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다.

앉아 있기도 힘들고 누워 있을 때도 다리를 벌리고 있어야 했다. 겁 많고 부끄럼 타는 성품에 매일 의사의 왕진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신애에게, 비록 늙은 의사라 할지라도 수치심을 견디는 괴로움은 극심한 고문과 같은 아픔 못지않게 컸다.

“혹시, 거기 흉터가 남지 않을까요? 혹시, 얘가 이담에 시집가는 데 지장 같은 건 없겠는지요?”

요강을 놓은 자책감에 울상이 된 엄마는 진회색 모본단 바지저고리 위에 고급 회색 세루 두루마기 차림으로 꺼떡거리는 의사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되묻곤 하였다.

“글쎄요 뭐, 별 문제야 있을라구요. 덴 자국이 매끈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시집가는 데 지장이야, 뭐-.”

늙수그레한 의사는 매번 능글거리며 같은 대답을 하였다. 튀김처럼 부풀은 환부를 사정없이 소독한 후 연고를 발라주기 전에, 다리를 벌리고 있는 신애의 아프고 부끄러운 환부를 한 번 더 약솜으로 쓱쓱 문지르면서.

제2장. 비명소리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다.

마루에 앉아 비를 내다보며 깊은 수심에 싸인 엄마는 6시 반에 이시가와가 오라고 한 군청에 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서 그에게 와이로(뇌물)를 주고 아버지를 면회할 생각에 골똘해 있는 것이었다.

신애는 체포되고 만 아버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노라면 슬픈 마음을 누르고 폭풍우를 품은 검은 구름처럼 머리가 아파온다. 걱정에 짓눌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신애는 ‘뇌신’을 먹고 얼마나 잤는지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웬 비까지 저리 퍼붓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한 마음을 푸념하며 엄마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시간 맞춰 빗속으로 나섰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속에 약을 먹어 신애는 머리가 휑하고 아질아질했다. 눈앞으로 별들이 스쳐가고 혼란스런 그림자가 아른거리었다. 그래도 엄마를 따라가 보려고 신애는 허둥대며 우비와 장화를 챙겨 신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어지럽고 배가 고프고, 신애는 우산을 썼어도 세찬 비바람에 흠뻑 젖고 말았다. 젖은 머리의 빗물을 손수건으로 짜내고 살며시 군청 수부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접수부는 비어 있고 곤봉을 차고 눈을 부라리며 거들먹거리던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본 결과 직원들은 퇴근하고 없다는 걸 확인하였다. 누구라도 사람이 나타날까 봐 신애는 구르는 공처럼 재빨리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불 켜진 사무실 앞에 당도하자 아버지가 처음 불려왔을 때 와본 적이 있는 이시가와의 사무실 창문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보았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창문의 틈새를 살금살금 밤 고양이처럼 들여다보았다.

이시가와는 느물느물한 웃음을 띠고 그 찢어진 눈으로 엄마를 늠실늠실 보고 있었다. 비에 젖어 후줄근한 엄마는 두 손을 하늘색 인조견 치마를 뜯어서 만든 몸뻬(몸통이 넓고 바지 아랫단을 오므린 일본식 바지) 입은 배에다 모아 쥐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여 신애는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는 지금, 오직 병든 남편을 징병에서 구해내야만 하는 절체절명과 맞서 있는 것이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