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알 수 없는 건, 광복군을 도와야한다며 중국을 오간 둘째 아들이었다. 어느 날 낮도깨비처럼 나타나서는 자기 몫의 토지를 팔아 큰돈을 품고 집 떠나며 한 둘째 아들의 말은 언제 생각해도 할머니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였다.

“어머니, 절 기다리지 마세요. 딴 세상이 올 때까지는요.”

그렇게 황황히 떠난 둘째가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어찌 할머니가 아시겠는가. 더 기막힌 노릇은 병이 위중해서 일본 유학 도중에 돌아온 막내아들이 철저한 반일파가 된 것이었다. 신애는 큰아버지와 다른 정신을 품고 있는 아버지를 속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못내 할머니는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 쪽을 택한 큰아들이 할아버지에게 면목 없고 마음 쓰리지만, 한편으론 징병이다 공출이다 시도 때도 없이 빼앗기고 시달림 당하던 걸 생각하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이제 와서 강력하게 질타하지도 못하는 처지가 분하고 서글플 따름이었다.

“그러게 군청에 나가서 거드는 척이라도 하라니까 설라무니, 고집이 밥 멕여주남? 똥고집을 부리더니 이번엔 웬만한 쇠푼으론 어림두 없겠구먼-.”

큰아버지의 말꼬리를 잡고 대발 친 약방에 여왕처럼 모시 한복을 차려입은 작은댁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기나 하답니까.”

병 깨지는 소리로 빽빽거리었다.

“사람을 꺼내 놓고 봐야지, 그게 당키나 한 말들이냐. 어서 나가서 알아보지 않구서니.”

할머니가 꾸중을 하시는데도 얼굴에 분가루를 쓴 큰아들의 첩실은 또 촉새처럼 말대꾸를 하고 나섰다.

“어디 한두 번 입니까? 무슨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책임감도 없고 도무지 뻔뻔하지를 않습니까?”

얄미운 여자다. 경성의 전문대학이 무엇이기에 그걸 코에 걸고, 사람 좋고 인물 좋고 재산 많은 큰아버지를 휘어잡고 노상 집안일에 빽빽거린단 말인가. 자기 얼굴 씻는 것 말고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고 엄마가 경멸하는 여자였다.

실상 그 여자가 싫기로는 본댁인 큰어머니가 제일일 것이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싫은 내색조차 못하고 빨래까지 해 바치는 굴욕적인 형편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여자 소생의 두 딸을, 안채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르는 처지였다. 할머니가 신애에게 말씀하셨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넌 집에 가서 동생들 돌보고 있어라.”

할머니께 공손히 인사하고 신애가 힘없이 널따란 마당을 나오는데 대문 앞에서 진자眞自를 만났다. 분홍색 간단후꾸를 입은 진자가 작은 눈을 깜작거리면서 말했다.

“신애야, 너 곤충 채집했니?”

신애가 고개를 젓자,

“그림은 그렸어?”

슬프고 기운 없는 신애는 다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땅굴에 숨은 후로 신애는 여름방학 숙제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구레용(크레용)이랑 도화지랑 줄게. 내일 느이 집 뒤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그림 그리자. 선자善自도 그림 그리는 숙제 있대. 니가 그려줄래?”

진자는 신애에게 무엇이나 샘을 내면서 잘난 척을 한다. 항상 등에 아기가 달려 있는 신애 엄마와 달리 자기 엄마는 곱게 차려 입고 약방에 앉아 있는, 경성에서 전문대학 다닌 귀부인이라는 걸 코에 걸고 다닌다.

자기 엄마가 둘째 부인이라는 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고 언젠가 큰엄마가 화내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신애가 공부 잘하는 것도 자기보다 품행이 단정하여 할머니와 구니모도 선생님까지 칭찬하는 것도, 자기보다 키가 큰 것까지도 진자는 시샘을 하였다.

“내일 안 돼. 그리고 나 도화지 있어.”

그러자 대뜸 진자가 쏘아붙였다.

“너, 그 운동화 우리 아버지가 배급소에서 갖다 준 거지?”
“아냐. 이건 구니모도 선생님이 반장 부반장에게 배급표 줄 때 받은 거야.”
“흥, 만날 우리 아버지한테서 운동화랑 설탕가루랑 속옷(내복)두 다 받아가면서.”

자기 엄마 못지않게 야젓잖은 계집애. 큰아버지가 배급소의 소장이었다. 하지만 매번 배급품의 반은 진자 엄마가 빼돌리곤 했다. 당장 어디다 팔아먹지도 못할 아이들 운동화며 설탕가루를 농 속에 쌓아두는데, 그걸 언제 무엇에 쓰자는 심보인지 모르겠다고 큰엄마는 이맛살을 찌푸리곤 하셨다.

예배당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신애가 다닌 유치원이 그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에 있었다.

신애를 보고 펌프 가에서 웃통을 벗고 세수하던 구니모도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는 유치원에 딸린 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신애는 그에게 이시가와가 과수원 뒷산 땅굴에 숨은 아버지를 체포해갔다고 보고하였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그는 피곤하고 머리 아픈 신애를 쪽마루에 앉히었다. 침통한 빛이 역력한 그는 이시가와와 친척지간이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려달라는 신애의 질문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전쟁이 일본에 매우 불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정도이다.

“내가 이시가와를 만나보겠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교단에서 가르칠 때의 진지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무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너는 결코 낙망하여 실의에 빠지는 허약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믿는다. 너는 훌륭한 여성이 될 것이다. 굳건한 의지를 품는다면, 식민지 국가에 태어난 것도 여자라는 점도 장애가 되지는 않을 거다.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전쟁은 언제고 끝날 테니까.”

‘곧 전쟁은 끝날 테니까’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그는 꾹 참는다. 기독교 신자답게 그는 신애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었다. 신애의 미래와 아버지의 징병에 대한 문제를 진실한 어조로 간구해 주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