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리, 오십 리 되는 장호원이랑 오천, 여주 등지에서 소를 몰고 온 베잠방이 남정네 서넛이 소 사러 나온 농부들을 휘돌아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덩치 큰 수소가 한사코 몸을 비트는 암소의 등을 타려고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못 볼 것을 본 듯 신애는 재빨리 고개 돌려 뛰다시피 발걸음을 빨리하였다. 장터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검정 귀마개 모자를 푹 눌러 쓴 금호가 주막집 굴뚝 옆에 빈 지게를 기대어 놓고 굴뚝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볼까 봐 신애는 급히 고개를 돌리었다. 금희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들 남매가 의붓아버지에게 매를 두들겨 맞고 밥을 굶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구니모도(國本)선생님과 장기 결석하는 금희네 집에 가정방문 갔을 때, 금희는 어둑한 방에 짐짝처럼 온몸이 퉁퉁 부어 누워 있었다. 언젠가 산으로 송진을 따러 간 날이었다. 아이들과 멀리 떨어진 소나무 그늘에서 엄마가 금희 것까지 싸준 주먹밥을 마주 앉아 먹을 때였다. 몸이 빼빼한 금희가 갑자기 눈물이 그렁해져서 의연히 말했다.

“나는 이다음에 무용가가 될 거야. 경성으로 가서 식모살이를 해서라도 꼭 무용학교에 다닐 거야.” 하고 울먹이던 금희는 여름방학을 맞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못하였다.

악착같이 공부하여 꼭 서울의 무용학교에 다니고 말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던 금희는 병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밥을 굶고 앓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꿈을 비쩍 마른 가슴에 품고 있는 금희의 가련한 모습이 눈에 밟히어 신애는 발걸음을 빨리하였다.

신애가 온천 앞의 큰길로 나왔을 때 센닌바리(千人針)를 만났다.

씻은 무처럼 희멀건 얼굴이 살짝 얽은 아기 업은 아낙네가 애원이 담긴 눈으로 신애를 바라보았다. 발걸음을 멈춘 신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오른손 바닥을 싹싹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아기 엄마에게서 얼른 빨간 실이 꿰어있는 바늘을 받아 한 바늘을 조심스럽게 떴다. 武運長久(무운장구) 중에서 久(구) 자의 맨 마지막 꼬리 부분의 한 땀을 찬찬히 뜬 것이었다.

“얌전한 학상 고맙구먼.”

목으로 굵은 땀이 흐르는 아기 업은 여인은 수줍은 듯 나이 어린 신애에게 고갯짓 인사를 하였다. 조금은 피곤하고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말없이 신애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었다.

센닌바리는 무명수건에 붉은 실로 武運長久라는 글씨를 천 사람의 여자가 한 땀씩 수繡를 놓는 것이었다. 천 사람의 여자가 기원한 ‘무운장구’라면, 천 번의 기도가 담긴 그만한 정성이라면, 감히 총알도 범접치 못할 것이란 간절한 바람이 담긴 수繡였다.

남정네가 징병 나가는 집에선 어머니나 아내와 누이들이 감출 수 없는 근심에 찌든 얼굴로 땡볕이 포탄처럼 쏟아지는 거리로 나와 정성 들여 센닌바리 수건을 만들었다. 무슨 부적처럼 출정 병사가 ‘센닌바리’ 수건을 머리에 동이면 전장의 총알도 비켜갈 것이란 희망을 굳세게 보듬고서.

막다른 벽에 몰린 일제가 병든 환자까지 조선 남자들을 모조리 전장으로 내보내는 술책을 쓴다고 아버지는 분노하셨다. 일본 여자들이 노소 없이 친절한 미소로 붉은 실의 바늘을 선선히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라고 아버지는 터지는 기침을 억누르며 말하시곤 했다.

붉은 댕기를 드려 쪽찐 새댁이 발걸음을 떼어놓는 신애의 팔을 잡고 센닌바리 수틀을 내어밀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신애는 붉은 실 꿴 바늘을 받아 정성껏 한 바늘을 떠 주었다. 고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신애를 앳된 새댁이 불렀다.

“혹시 학상…… 도라도시(寅年-호랑이 띠) 아닌가?”
“도라도시요……? 저는, 그렇게 무서운 띠가 아니에요.”
“그러믄 됐어유…… 고맙구먼.”

작게 미소 지으며 신애는 무더운 장터를 빠져나왔다. 호랑이해에 태어난 여자는 센닌바리를 할 때, 나이만큼 바늘을 떠야 하는 미신이 있다는 걸 신애는 알고 있었다. 바로 엄마가 ‘도라도시’인 것이었다. 엄마는 센닌바리를 해줄 때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엄마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으므로 서른 바늘 넘게 뜨려면 수數를 세느라 힘이 들고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여러 사람에게 붙들리면 엄마는 영락없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마에선 구슬땀이 죽죽 흐르고 등에 매달린 아기는 칭얼대며 보채기 일쑤이므로. 하지만 엄마는 아무리 발길이 바쁘고 힘들어도 센닌바리를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바로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남자 동생이 징병에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온천을 지나고 변전소 쪽으로 돌아선 신애 앞에 누군가 딱 멈춰 섰다. 국방색 옷의 남자를 본 신애는 엄마야-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소금기둥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너, 왜 그렇게 놀라는 거냐?”

조선말로 힐문하는 남자는 끔직한 이시가와였다. 입을 악다물고 있는 신애에게 그가 눙치며 말하였다.

“너, 지금 혼자서 어디 가는 거냐? 이 더운 낮에-.”

신애는 아무렇지 않게 시침을 떼야 한다고 속으로 급히급히 생각한다. 하지만 도무지 얼른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구니모도 선생님은 자주 말하곤 했었다. 마음이 깨끗하고 잘못이 없는 사람은 눈길을 비끼지 않고 상대를 바로 보는 것이라고.

“너, 이 가즈오 삼촌에게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거야? 앙-.”

이시가와의 으름장에 떠밀리어 신애는 말하였다.

“우리…… 과수원에, 가요.”

인가가 없는 이곳에서 다른 어디에 간다고 꾸며댈 수 있단 말인가. 신애는 더 달리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댈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오직 주머니 속에 있는 편지 때문에 밀짚모자 쓴 이마에서도 주먹을 꽉 쥔 손바닥에서도 질퍽하게 땀이 배어났다.

“과수원에를 간다…… 너 혼자서?”
“원두막에서 놀려구요. 이 하모니카 불면……서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니, 방학숙제를 한다거나 책을 읽을 거라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는 거짓말인 것이다.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 빨간 하모니카는 실제로 원두막에서 불려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