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얼굴임에 틀림없다. 그와 헤어질 때 그대로의 얼굴이다.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합죽한 두 볼의 모습이 가려진 얼굴. 해야 할 말을 선한 눈빛 속에 숨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 얼굴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면서 애써 외면하고 나는 미국으로 와 버렸다. 그는 그 후로 나를 무척 찾았을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그 친구 돈을 썼다. 사업 실패로 그는 같이 파산하고 말았고 부동산 보증으로 인해 집도 날렸던 것이다. 이혼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면서 지금까지 외면하고 살아왔던 나를 그 친구가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나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한국을 방문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믿고 있다. 친구에게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평생 만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라고 버티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나갈 때마다 친구들과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을 탈 때마다 그의 이름이 생각나 불안해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한참 미국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헌집을 사 고쳐서 되파는 일을 통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그 친구 생각도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나쁜 짓을 한 나도 잘 사는데 선하게만 살아가는 그 친구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잘살게 됐을 것이라 여기며 잊으려 했다. 신이 있다면 그가 잘 살아야 한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 친구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준 것도 아니라고 합리화시켰다. 골프를 즐기고, 유람선 여행으로 알라스카, 유럽을 다녀오면서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도 이호선의 생각을 외면하며 살았다.

그런 이호선이 지금 걷는 길의 동행자라니? 그는 동행자가 아니라 나를 데리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를 안내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깊은 후회에 휩싸였다. 같이 걷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데 그들의 모습이 뱀 같은 형태와 이상한 괴물로 변하는가 하더니 순식간에 머리에 긴 뿔이 달린 염소의 모습으로 변하는 거였다. 모두가 호선을 돕는 호위병들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겁이 났다. 나는 호선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고 반복해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호선의 손에서 내 손은 계속 풀어져 내렸다. 손이 더 이상 손으로 일하지 못하고 있다. 손을 다쳐서 그럴 거라 여기며 왼손을 보지만 아무 상처도 없다. 호선이 용서해 주지 않으면 손을 잃을 것 같은 절박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 계속해서 그의 손을 잡으려 애쓰며 애원한다. 호선의 손에서 내 손이 흐물흐물 녹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든다.

호선의 얼굴이 사라지고 노인이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순간 손에 힘이 생기며 노인의 손을 덥석 쥘 수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날카로운 아픔은 아니지만 멍한 통증이 왼손에서 느껴진다.

*

눈을 슬며시 떴다. 하얀 빛이 가득한 방에 누워있다. 수술실이 아닌 것 같다. 깨어 있는 건지 아닌지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다는 흐릿한 생각이 들었다.

시야에 녹색 가운을 입은 남자 간호사가 나무처럼 서 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간호사 얼굴에 하얀 수염이 가득하다. 나는 순간 놀라며 그를 외면하자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 왼손을 만진다. 그가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데려갈 것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대답 대신 몇 시간이나 수술을 한 것이냐고 물어보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왼손을 당겨보려 하지만 덤덤할 뿐이다.

나는 세 시간을 넘게 마취약에 취해 있었다. 마취가 깨는지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왼손에는 온통 지지대와 압박붕대로 감겨져 있다. 수술이 잘되었지만 경과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의사는 말한다. 특히 왼손 중지 끝이 문제라고 한다. 경과가 좋아 끝이 살아날 수 있어도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의사의 말이나 손끝이 붙어 있는 것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고 마취 중에 꿈처럼 보았던 노인과 호선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전에 느끼지 못하던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오늘은 병실에서 하루 지나고 마취가 완전 풀린 후에 퇴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오늘 퇴원해야 할 여러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효과가 있었는지 의사는 퇴원을 허락한다.

병원 복도를 걷는데 심한 구토증세가 인다. 의사는 마취가 풀리면서 구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 모든 것을 토해낸다. 눈물, 콧물까지도 다 빠져나오는, 창자까지도 토해낼 것 같은 구토를 한다.

한 손으로 겨우 얼굴을 닦고 나오는데 가벼운 느낌이 든다. 손에 통증과 무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는 꿈속에서 걷던 길을 가볍게 걷고 있는 느낌도 든다. 공복의 편안함이 느껴진다.

*

여유가 있으면서도 매달 지불하는 보험료가 아까워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형편이 되었다. 건강을 자신하며 교만했던 마음은 한 순간의 사고로 한국에 비해 10배도 넘는 치료비를 감당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며 이번 기회에 한국에 나가 치료를 받고 오고 싶다고 했다. 친구 호선을 찾아 용서를 빌고 싶다며, 후회스러운 일을 더 이상 그냥 둘 수 없다고 했다.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아내의 신앙심까지 이용했다. 성경에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하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몰아 세웠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무겁고 힘들게 날아오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이륙은 가볍게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꾸었던 어수선한 꿈들 속에서 생생한 기억이 되는 꿈을 꾼 후로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사소한 일에 민감한 나를 보게 된다. 진통제를 먹을 시간이 되었는지 왼쪽 손이 쑤셔온다. 오른손으로 약을 찾아 입에 넣고 물을 마신다. 허리에 찬 전대를 신경 쓰면서 오른손으로 왼손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