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무슨 장비를 밀고 다가온다. 직업적인 미소를 건네며 X-ray를 찍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통증이 심하니 마취주사를 맞거나 진통제를 좀 먹을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한다. 간호사는 정확한 진단 없이는 어떤 의료행위도 할 수 없다고 냉담하게 대꾸한다. 다치지 말 것이지 왜 다쳐가지고 그러느냐는 비웃음이 섞인 말같이 들린다. 다치고 나면 어차피 고통은 따르는 것이고 참아야지 별 수 없는 일이라는 충고까지 섞인 말투다.

간호사는 X-ray를 찍으면서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묻지만, 의례적인 질문일 뿐 내 설명에 귀 기울이는 눈치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말을 한다. 몇 번째 반복하는 말을 통해서라도 통증이 온몸으로 번지며 굳어가는 느낌을 희석해 보고 싶어서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오른손으로 판자를 밀고 왼손으로 판자를 잡아주면서 모양을 만들려다 당한 일입니다. 오른손이 좀 더 힘을 주어 밀어내야 하는 순간인데 밀어내는 것을 멈췄습니다. 반사적으로 왼손이 판자를 잡아당기려다 톱날에 물린 것입니다. 물론 오른손 탓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다가 꼭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덮치더군요. 그 순간 오른손에 힘을 뺀 것은 다른 생각이 스쳐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니까요.”

간호사는 힐끔 나를 쳐다보면서 손의 위치와 모양을 고정시켜 주더니 잠시 한쪽 구석으로 가서 선으로 길게 연결된 버튼을 누른다. X-ray 선에 자주 노출되면 인체에 해로워서 하는 행동일 거라 짐작한다. 다시 간호사가 다가와 손 모양을 뒤집더니 손가락을 최대한 벌려보라고 한다. 아무리 손가락을 벌리려 해도 통증만 더할 뿐 벌어지지 않는다. 간호사는 손가락을 벌리지 않고 사진을 찍으면 소용이 없으니 아파도 참으라고 하며 억지로 손가락을 벌려 사진판에 밀착시킨다. 자꾸 오므라들려는 손가락을 아픔을 삼키며 참는다. 간호사는 다시 구석으로 가 버튼을 누른다.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며 석 장의 사진을 더 찍는다. 장비를 챙기고 금방 갈 것 같던 간호사가 무슨 생각이 스쳤었느냐고 묻는다. 맥 풀린 상태로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며 하던 말을 이어간다.

“생각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스친 것입니다. 왜 사람은 자기 의지와 관련 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요? 그것도 한 가지 생각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전혀 연관도 없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간호사 표정이 일그러진다. 손을 다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통증을 견뎌보려고 꺼낸 말이니 미친놈 취급을 받아도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낫다 싶기도 했다. 아니 두 가지 스친 생각을 말했다가는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바빠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수 없다며 멋쩍게 자리를 뜬다. 주위가 조용하다. X-ray 사진이 현상될 때까지는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손끝이 굳어 들어가는 느낌이 계속 든다.

*

순간적으로 드는 느낌과 생각이 문제였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과도 무관한 생각, 눈으로 보이는 사물에서 전해지는 시각과도 관련 없이 스친 생각이 사고를 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왜 그 생각을 했을까? 하나의 생각은 그래도 이해가 되고 부끄럽지 않은 생각이다.

한국 방문을 며칠 남기고 주변정리를 하고 있었으니 자연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지난번 귀국 시 바쁘다는 핑계로 장모님을 뵙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장모님을 뵙지 못한 것이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으니 쉽게 잊히지 않고 문득문득 생각이 스치며 지나가는 거였다. 나이가 들면서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만 쌓이는 기분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은 엉뚱하기가 그지없다. 얼마 전 이웃 파티에 초대받아 다녀오는 길에 술 취한 두 여학생이 지나치는 내 차를 향해 엉덩이를 까고 허리를 굽혀 하체를 노출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당황한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렸고 젊은 애들이 별 장난을 다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 뒤로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순간 그 엉덩이 생각이 영상처럼 스쳐지나간 것이다.

잔영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잔영이라면 간밤의 꿈속 장면이라든가 드라마를 본 후 계속 지워지지 않고 생각나거나 떠오르는 영상이 아니겠는가? 굳이 그 순간을 관념적으로 분석해보면 하나는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후회라고 하자.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다. 순간 겹친 영상은 전혀 관련도 없고 공통점도 없다. 한편으로 자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육적인 감각에 빠져버리는 생각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시각적으로는 톱에 잘려나가는 판자를 보며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머무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볼 때는 보는 것으로,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것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이중성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는 걸까? 사람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이중성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머리는 하나지만 전체 몸은 둘로 나뉜 팔과 다리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의 얼굴 속에 두 눈, 두 귀의 균형이 조화의 중심이다. 하나이면서도 둘인 것이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중성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나는 짝으로 균형을 지닌 모습이 인간의 이중성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면서 마음으로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하나이면서 둘인 조화와 균형이 아니라, 둘이면서도 하나인 조화가 뿌리일 수 있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나는 오른 눈의 시력이 왼쪽 눈 시력보다 좋다. 겉으로는 같은 크기와 모양인 것 같은 귀도 자세히 보면 짝짝이다.

아내를 품에 안고 옛 사랑을 생각하는 순간의 이중성을 괴로워한 적도 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면서 이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스치는 것은 뭐란 말인가. 사람에게서 보이고 드러나는 순간보다,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보다 더 진실 된 모습은 생각인 모양이다. 나누어진 생각이 아니라 하나로 집중된 생각이 사람의 진심일 게다. 다친 손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이 상황에서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다. <계속>

주경로 작가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소설 부문 당선, 재외동포문학상 우수상·미주동포문학상 대상·천강문학상 대상 수상, 장편소설 <스터디 그룹><우리들의 교향곡>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