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이어령 박사(왼쪽)와 이재철 목사 간의 대담이 이뤄지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그들이 돌아왔다. 지난해 ‘지성과 영성의 만남’을 주제로 8차례에 걸쳐 대담을 펼쳤던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와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이번에는 ‘문화로 성경읽기-예수와 비유’ 시리즈를 시작했다. 29일 오후 8시부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열린 이번 대담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분석했다.

이번 주제가 ‘문화로 성경읽기’였던 만큼, 사회자 없이 주로 이재철 목사가 이어령 박사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대담이 이뤄졌다. 이재철 목사는 지난 2월부터 7개월간의 안식월(月)을 가진 바 있다.

이어령 박사는 먼저 ‘성경 읽기의 재미’에 빠져보라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읽을만큼 성경은 매력적인 책인데,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읽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 비치는 그 즐거움을 모른다”며 “제가 한국에 처음 기호학을 소개했는데, 인간의 언어로 된 것들을 철저히 기호화하면 하나님의 언어가 유추되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밝혔다.

‘첫째 아들 같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던 탕자의 비유

▲이어령 박사.
이재철 목사는 “이 비유 속에는 아버지와 첫째, 둘째 아들 등 세 인물이 등장한다”며 “모든 사람들은 ‘탕자 돌아오다’로만 얘기하는 데 이는 잘못 읽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이러한 비유가 나오게 된 이유를 살펴야 한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이 나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 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왜 죄인들에게 이야기하고 말씀을 전하느냐고 질문했다. 결국 이 비유의 포커스는 평신도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바리새인이었다.

이 박사는 “‘분리하다, 쪼개다’는 뜻의 바리새인들은 천민과 귀인, 죄인과 선인,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등 철저히 고르는 사람이었고, 율법을 가장 많이 내세운 교조주의자들 같았다”며 “그래서 탕자의 비유를 비롯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먼저 99마리 양을 놔둔 채 잃은 양 1마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잃은 양 한 마리를 뜻하는 죄인들, 세리들, 지탄받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느냐고 따졌다. 여기에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99마리 중 하나이고, 의로운 사람을 놔둔 채 오히려 죄 지은 자를 구하러 가는 게 내 스피릿이며, 너희들이 생각하는 의로운 자 99명보다 참회하는 1명의 회개자를 더 찾으신다고 답하시며 바리새인들의 논리를 철저히 부수시는 것이다. 이 박사는 “유목민이라면 이 양치기의 마음을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한 드라크마를 떨어뜨린 여인 이야기다. 지금으로 치면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떨어졌는데 나머지 9개의 동전을 놔둔 채 등불을 들고 온 방을 찾아다니는 식이다. 유목의 경험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누구나 사용하는 화폐에 관한 이야기다.

세번째 ‘탕자의 비유’는 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가 찾아나서지 않은 점에 특색이 있다. 앞의 두 비유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직접 찾아나섰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으로 구석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여기서는 큰 아들을 ‘내버려둔 채’ 작은 아들을 찾아나서지는 않은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는 ‘찾다’가 아니라 ‘맞이하다’인데, 양들은 한 번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하고 동전도 마찬가지”라며 “하지만 사람은 찾지 않아도, 영혼을 가진 존재는 참회하며 뉘우치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왜 아버지는 찾아다니지 않고 기다렸나

예수님은 찾아다녔다기보다, 세리와 창기들이 찾아와서 복음을 전해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왔기 때문에 참회했고, 이제 죄인이 아니다. 이 박사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찾아다녔어? 지들이 왔지’라고 말하는 것”이라며 “바리새인들은 마치 큰아들처럼 뭔지도 모르고 옆에 있게 된 꼴이고, 가만히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바리새인들이 꼼짝 못하게 비유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예수님께서 왜 같은 주제를 3번씩 이야기했는지 모르고 뒤의 탕자의 비유만 읽으면 안 된다”며 “세 비유는 각각 유목민에게, 상인에게, 정주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시대와 직업을 초월해 누가 들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한 유니버셜 구조”라고 전했다. 또 “바리새인들이 똑똑했으면 비유를 듣다가 ‘내가 큰아들인가? 큰일났구나’ 했을 정도로 빈틈없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짜여진 비유”라며 “그래서 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레토릭이고, 에덴동산과 아담·하와, 그 아들인 가인·아벨 등까지 기호학적으로 하면 너무 기가 막히고, 부분과 전체가 같은 프랙탈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재철 목사는 이에 “작은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왔으며 아버지는 맞아준 것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탕자의 스스로 뉘우침만 강조하면 자기 행위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며 “탕자가 뉘우치고 집에 돌아간 근거는 낳아주신 친아버지가 계시고, 종이라도 받아주리라는 믿음에 근거했으므로 아버지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고 질문했다.

이어령 박사는 “왜 양과 드라크마와 달리 아버지는 찾으러 가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며 “사실 찾아가는 하나님, 맞이하는 하나님은 같은데, 탕자의 비유만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역할이 별볼일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래서 세 가지 비유를 함께 사용하셨다”고 풀이했다.

이재철 목사는 또 “아들이 돈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거절하지 않았고, 아들은 부잣집 아들로 좋은 옷 입고 통통하게 나갔다가 허랑방탕하고 돈이 다 떨어져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왔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며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 보자마자 거지가 된 아들을 알아봤으니 실은 아들을 내보내고 매일 그렇게 기다리신 게 아닌가, 바꿔 말하면 이 아들은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되돌아오리라 믿은 게 아닌가” 하는 관점을 나타냈다.

이어령 박사는 “비유법에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왜 죄인들을 내쫓지 않고 맞이하느냐’는 질문의 답변으로 읽어야 한다”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열 사람의 의인보다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하신다’, ‘너희 바리새인들도 대단하지만, 회개한 죄인이 아버지는 더 귀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냥 믿지 말고, 철저히 지성의 궁극까지 내려가야

▲이재철 목사.
이 박사는 “놀랍게도, 기독교는 파더십(father-ship)만 얘기하지, 선십(son-ship)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성경은 아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의 몫이 아닌가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비유들은 모두 윗사람들이 해 주는 쪽만 이야기했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며 “하나님께서 약속을 안 지킨 것 같지만, 조금 늦었을 뿐이지 안 지킨 게 아니라고 하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악과를 강제로 못 먹도록 입을 막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아버지는 비유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이하신다”며 “스스로 뉘우치는 마음을 주시고, 이를 믿으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령 박사는 “이렇게 기호학적으로 한 구절씩 읽어가다 보면 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미를 철저히 읽을 수 있다”며 “교회에서도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믿자’고만 하지 말고, 철저히 지성의 궁극까지 가 보고 거기서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아야지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놔두고서는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요즘 베스트셀러 많이 읽지만, 성경은 나온지 몇천 년 된 진짜 베스트셀러에 롱셀러”라며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읽혀야 할 책”이라고 잘라 말했다. 특히 다른 경전들은 깨끗한 이야기만 나오는데 성경에는 민망한 얘기, 불리한 얘기들이 다소 나온다고 했다. 앞뒤가 다 맞으면 읽을 필요가 없고, 합리적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성경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주며, 우리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달라지고 읽고 나서도 달라지고 그래서 마치 만두를 먹듯 통째로 먹고 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만두를 분석한다고 껍데기 먹고 양념 먹고 돼지고기 다진거 먹고 한다고 알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자신이 기호학으로 하나하나 따져서 분석했지만, 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엉성하고 해결되지 않고 모순되는 부분은 만두를 통째로 씹듯 목사님께서 기도와 신앙의 힘으로 해 주셔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기호학으로 감동과 초월은 경험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 과정을 철저히 밟아야 하나님께 손을 내밀게 되고, ‘목사님 이거 봐 주십시오’ 하면 목사님은 하나님과 접속해서 풀어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해 가면 그 이상의 것들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부터 신학이 생기고 기도의 언어가 생겨난다. “그러니까 내가 교회 나오지 지식으로 치면 내가 왜 교회에 나오겠는가”라고도 했다.

아버지에 두 아들까지… 어머니는 어디로 갔나

이어령 박사는 “덧붙여 꼭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 비유에는 좀 나올 법도 한데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다”며 “진짜 내 새끼, 하면서 우는 건 어머니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맹목적이고, 타고났으며, 그렇게 주어진 사랑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당연한 듯 타고나 밑에 깔려있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법과 질서, 정의 등으로 어머니와는 다른 사랑이다. 결국 이 비유에는 아버지가 나오는 게 맞았던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시오’ 하는 게 바로 비유”라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와 같고,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와는 다른 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가페와 비슷하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권위가 있으므로 비유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날 낳아주셨다고 하면 복잡해진다”며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걸 모두 기호학에서 철저히 따지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