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필자가 이슬람에 대한 칼럼을 인터넷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내 이름은 칸’이라는 영화를 꼭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라는 댓글을 올려 주셨다. 하지만 그 영화를 어디서 상영하는지도 몰랐고 계속되는 해외여행으로 영화를 볼만한 시간적 여유를 찾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추석 연휴를 맞아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일 삼아서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객 수 40만을 넘었다는 그 영화는 인도의 국민배우 샤룩 칸이 주연을 했으며 인도에서는 최대의 흥행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강력하게 추천할까? 큰 기대를 품고 끝까지 보고난 소감은 한 마디로 무슬림들은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피해자요 미국인들은 잔혹한 가해자라는 사상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이슬람 홍보용 영화’였다.


줄거리를 대강 말하자면 인도에 살던 무슬림 리즈완 칸이라는 자폐증 환자를 헌신적 사랑으로 돌봐주셨던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칸은 의사인 동생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전 남편의 아들 샘을 홀로 키우고 있는 만디라라는 힌두교 여인과 결혼을 하려는데 동생은 무슬림이 아닌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9.11 테러가 일어난 후 무슬림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깨지고 샘은 학교에서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고 살해된다.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되던 아들을 남편의 종교 때문에 잃고 격분한 아내는 남편과 결별을 선언한다.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칸은 어떻게 하면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지를 묻자 아내는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 이름은 칸이고 나는 테러범이 아니다”는 말을 하고 오면 같이 살겠다고 한다.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칸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려고 방황하다가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기도하는데 거기서 훼이살 라흐만 박사의 폭력과 테러를 선동하는 설교를 듣고 “당신은 나쁜 사람, 거짓말쟁이다”라고 외치며 나온다. 그는 대통령을 만나려다가 테러범으로 오해받아 옥에 갇히게 되지만 옥중에서 훼이살 라흐만 박사가 이슬람 사원에서 테러를 선동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이 체포되고 칸은 결국 석방되었다. 그 때 미국에 수해가 발생하자 착한 무슬림 칸은 자원봉사에 발 벗고 나서 매스컴을 타게 되고 결국 미국 대통령을 만나 아내가 원했던 말을 전하고 칸 부부는 다시 결합하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점이 있다. 모든 무슬림들은 과연 착한 피해자인가?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매일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 바로 며칠 전인 2011년 9월 9일 저녁 8시쯤에 나이지리아에서 14명의 크리스천들이 무슬림들에게 살해됐다. 그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으며 생존자 기양 바둥 씨는 아내와 네 자녀와 어머니와 할머니와 조카가 살해됐다고 말했다. 9월 한 달 동안만 해도 나이지리아에서 100명 이상의 무고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게 살해되었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2011.9.23 오픈도어 주간 박해뉴스)

중동 아프리카 등 지구촌 곳곳에서 거의 매일 발생하는 이런 사건의 피해자들은 오직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외에는 전혀 그들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 순수한 민간인들이지만 세상의 어떤 사람도 무슬림들의 테러가 무서워 이런 것을 영화로 만들어 호소하지 않으며 이런 잔인한 기사를 감히 토픽으로 다루지도 못한다.

몇 년 전에 용감하게도 이슬람 여성들이 당하는 처절한 학대를 다룬 ‘굴종(submission)’이라는 영화를 만든 반 고흐 감독은 유럽의 길거리에서 자건거를 타고 가다가 한 무슬림 청년에게 살해되었으며 그 청년은 법정에서 “만일 석방된다면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들을 또 살해할 것이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 시나리오를 쓴 히르씨 알리 씨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도주하여 지금도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또한 이슬람의 잔학성을 알리는 ‘피트나’라는 짧은 동영상을 만든 네덜란드 국회의원 기르트 윌더스 씨는 ‘이슬람포비아(이슬람혐오증)’ 증세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입국 거부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영화는 이슬람을 피해자로 홍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지만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그 속에 숨겨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영화의 주인공 칸 씨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착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서 배운 것이지 이슬람의 경전과 교리를 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미국의 이슬람 사원에서는 설교자가 폭력과 테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설교자는 몰지각하고 무지한 광신자가 아니라 이슬람을 깊이 공부한 박사였다. 오히려 칸의 어머니는 평범한 인도 무슬림으로서 꾸란에 기록된 아랍어를 이해할 수조차 없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즉 이슬람의 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평화를 말하지만 진짜 이슬람의 교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가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설교를 통해서 감동을 받은 순진한 젊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전사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어느 날 갑자기 테러범으로 둔갑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온건한 무슬림들은 항상 온건한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며 이슬람을 교리를 더 깊이 깨달아 헌신된 무슬림이 되어가는 동안 점점 더 과격해져 갈 것이다.

여기서 꼭 확인해 봐야할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관객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인용한 유일한 꾸란 구절이 있다. 바로 꾸란 5장 32절이다. “알라께서는 무고한 사람 한 사람을 살해한 것을 모든 백성을 살해한 것과 같은 죄로 여기시느니라...” 꾸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을 확인하는 순간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알라께서 유대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무고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구절은 ‘지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이는 ‘무슬림’을 말하는 것이다. 즉 ‘무슬림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든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죄로 처벌하겠다’고 유대인들을 향해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 구절은 무슬림 설교자들이 강연을 할 때마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다. 그런데 항상 32절만 읽어주고 바로 그 다음 구절은 절대로 읽지 않는다. 사실 32절보다 더 중요한 구절은 바로 그 다음 절 즉 꾸란 5장 33절인데 인용해 보면 “그러나 알라와 무함마드를 대적하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는 자들은 죽이거나 십자가에 처형하거나 손과 발을 대각선으로 자르거나 해외로 추방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도 ‘지상에 해악을 뿌리는 자들’이란 알라와 무함마드를 대적하는 자들 즉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있으며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무고한 사람 즉 무슬림은 절대로 죽이지 말라 그러나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죽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무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을 억지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 속고 있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속이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내 이름은 칸이라는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애매하게 피해를 보는 무슬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런 생각을 해왔던 영국의 데이빗 캐머런 총리는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평화공존 정책의 실패를 선언하면서 “우리가 그들을 보호해 주는 동안 그들은 우리 안에서 원리주의를 키워갔다”고 한 말을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온건한 무슬림들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건하거나 폭력적이거나 무슬림들의 지상목표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어 인류의 종교를 이슬람으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꾸란8:39) 그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꾸란 구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평화스런 이미지로 미화시켜 순진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과 테러로 방해되는 세력들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은 지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슬람의 ‘전략적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애매하게 테러범 취급당하는 무슬림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슬림들에 의해서 도처에서 거의 매일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 즉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고 교회에 불 지르고 옥에 가두는 등의 실제로 저질러지는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무슬림들이 테러범으로 오해받는 것을 불쌍하다고 호소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꾸며놓은 영화에는 감동하는 순진함에서 깨어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국가 안보와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