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근 목사
여러 종교의 교리와 가치관이 뒤섞여 혼합을 이루는 현상을 종교학에서는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라 일컫는다. 우리 사회에도 여러 종교가 긴 세월 함께 존재하다 보니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게 되면서 혼합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례로 불교의 사찰 한 편에 샤머니즘의 상징인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져 있는 점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유교에서 조상 제사를 받아들여 제사 문화가 정착된 것 역시 한 예이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마치 비빔밥과 같다. 무속신앙(巫俗信仰)에다 불교, 유교의 요소까지 기독교 안에 깊이 침투하여 기독교 복음의 본질(Evangelical Identity)을 훼손하고 있다.

유교의 권위주의와 계급적 직분개념

유교의 가부장제는 남존여비사상을 낳았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유교의 가부장제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한국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이러한 모습은 한국교회에서도 여실히 보인다. 교회 구성원의 70%이상을 차지하지만 교회 여성들은 가부장적 질서의 희생자로서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청소, 식당봉사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지만 교회운영과 주요직책에서 배제된다. 교회 여성은 권리는 없고 희생만 강요받는 내조의 여왕으로 전락했다. 전통적인 유교적 여성상과 여성의 역할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김세윤(풀러신학교 신약신학 교수)박사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버렸다”고 개탄했다. 여성을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유교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질서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갈 3:28)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또 하나의 유교적 요소는 권위주의다.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대표되는 상하 질서의식은 나이로 구분되는 서열의식을 뜻하는데, 높은 서열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유지하고자 근엄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여기에서 권위의식과 상하위계질서가 강조되는 권위주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신분사회가 만들어낸 서열중심의 구조와 정신이 교회 내부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 간의 관계를 계급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의 직분은 다만 은사에 따라 주어지는 질서일 뿐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유교의 이 서열의식이 교회 직분자들로 하여금 섬기는 종이 아니라 권위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평신도-집사-안수집사/권사-장로-목사로 이어지는 위계질서와 서열의식을 볼 때 과연 누가 “그것은 다만 은사에 따른 배치일 뿐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목사 대신에 ‘당회장’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목사들의 자세도 유교적 권위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유교 문화의 가부장적 권위의식 및 계급적인 직분 개념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불교적 사고(思考) 및 언어 습관

언어는 思考의 거울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교의 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슬픔을 당한 유가족을 위로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빕니다”라고 조문 한다. 교회의 장례예식을 집례하는 목사도 “이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전혀 기독교에서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말은 불교(佛敎)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福)을 뜻하는 불교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의 소란 때문에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며 교사가 전도사에게 하소연한다. “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떨어서 성경공부를 진행할 수 없어요.” 불교에서 야외 법회를 할 때 쓰는 단(壇)이 ‘야단법석’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는다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못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 면목이 없어요...” 면목은 ‘불성을 가진 상태’를 이르는 불교 용어다. “요즘 한국교회의 ‘화두’는 회개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오류인데, 화두(話頭)는 ‘참선 수행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실마리로서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을 뜻하는 불교용어다.

이런 기막힌 말도 있다. 늦깍이 목사! 언젠가 일반신문도 아닌 교계신문에 “아무개 씨가 늦깍이 목사가 되다”라는 헤드라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늦깍이’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중이 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기독교는 나이 많든 적든 목사가 될 때 머리를 깍지 않는다. 늦깍이 목사라니, 이게 될 말인가... 아무리 수사적인 표현이라 해도 그것은 적절하지 않은 용어선택인 것이다.

무속적 종교의식(宗敎意識)

한국교회 안에는 무속적인 요소들도 적지 않다. 무교에서 무당(샤먼)은 신을 불러 내릴 수 있고 영계를 탐지하며 영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 신령과의 접신을 통해 모든 종류의 인생문제(길흉화복)를 해결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영험한 무당을 선호한다. 성도들이 바른 말씀과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목사보다는 특별한 산기도나 40일 금식 등 초인적인 체험담을 가진 목사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러한 무속적 정서에 기인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소위 용하다는 목사, 권사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동반된다. 한국교회 안에 카리스마적이고 다혈질적이며 절대권위를 가지고 독재를 행하는 목회자를 따르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한국교회에는 ‘소원헌금’ ‘소원예물‘이라는 헌금도 있다. 소원 성취를 위해 바치는 헌금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무당이 푸닥거리나 굿을 할 때 제주가 행하는 버릇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식(宗敎意識)이 무속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불교와 무속의 새벽 예불과 새벽 정한수 기도가 새벽기도회로 정착된 것도 세계 기독교 교회사상 유례없는 현상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민 33:51-53).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땅의 모든 토착종교를 완전히 제거하라는 말씀이다. 거짓 종교를 수용하거나 체질에 맞게 토착화시키지 말라는 명령이다. 한국교회의 신앙행태를 가리켜, 생각은 불교적(佛敎的)으로 하고 생활은 유교적(儒敎的)으로 살고 신앙은 무속(巫俗)(샤먼)적으로 믿는다는 말이 있다.

한국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려면 한국인의 심성적 바탕인 샤머니즘을 비롯해, 한국 기독교 내부에 들어와 있는 불교 및 유교적인 요소들을 파악하고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의 철저한 분리가 없는 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유석근 목사(알이랑교회)

* 경기도 부천에 있는 알이랑교회의 담임목사로 성경에 계시된 한민족의 정체성과 구원사적 사명의 선포를 소명으로 삼고 있다.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을 출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