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씨, 정말 날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부모님께 결혼 얘기를 꺼낸 다음 날이었다. 결국 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그녀는 한걸음에 달려와서 나를 카페로 불러냈다.

“부모님이 반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그냥 내 곁에 있어만 줘요.”    

“해연이, 나는 이제 다시는 정도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아. 지하철 참사의 후유증은 한 번으로 족해.”
“안개 낀 공원에서 부랑자 생활을 할 때의 패기는 다 어디 간 거예요?”
“그건 패기가 아니라 객기였어.”

여전히 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그녀가 경이로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의사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해연이, 우리 인내를 가지고 좀 더 기다려 보자. 그러다 보면… .”
“그러다 보면 뭘요? 아버님의 뜻이 바뀌기라도 하나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커피만 홀짝거렸다.
“결국 그랬군요. 당신도… 결국… 아, 내가 그날 그 공원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그녀의 눈물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뭐라구요? 해연이가 없어졌다구요?”

“그래, 그렇다니까. 자네에게 갔다 온 후로 며칠간 밥도 안 먹더니 나가서 벌써 삼일 째 소식이 없네. 내 외동딸 해연이가… 절대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절대….”

핸드폰의 뚜껑을 닫는 순간 처음으로 지하철 참사를 모면한 것에 대한 슬픔이 왈칵 몰려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해연이와 내가 맨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는 다만 내가 휴학 기간 동안 친척집에 머물면서 자신의 교회를 찾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절대로 자기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88고속도로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명의 실종자를 찾아서.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없었다. 한동안 나의 침상이 되어주었던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바뀌거나 말거나 여전히 자신만의 허름함으로 마음껏 버티고 있는 벤치는 분명 쓸쓸함이었다.

그곳에 앉아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있던 나에게 어디선가 굴러온 <안개>가 내 시선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자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달라는 듯. 결국 나는 그 전도지에 이끌려 며칠간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허탕이었다. 해연이는 이미 종적을 감춰버린 사람이었다.

<하늘이 왜소하게 느껴지는 날은 내가 차라리 하늘이 되기로 했다.
사랑함으로 멀어지기로 한다는 말. 그 말보다 더한 절박함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사랑함으로 차라리 멀리서 보는 것이다. 아끼는 산은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듯. 죽어도 헤어지지 말자는 말, 그건 언제나 거짓말이므로….
그날 카페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내가 쓴 ‘안개’는 틀리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당신의 나에 대한 사랑이 고작 그 정도라 할지라도 덮어놓고 결혼을 구걸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하더군요. 이제 나는 돌아갑니다. 내가 태어난 서울로….>

‘내가 태어난 서울? 그러면 해연이는 서울 사람?’

그녀를 찾아 안개 속을 헤매는 사이 나의 새편지함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녀의 메일을 다 읽어 내려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에게서도 그쪽 사투리를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여보 오늘 시간 있지요?”
“왜?”
“오늘 나랑 여기 한번 가 볼래요?”
“어디?”
“여기 이 신문 좀 보세요. 주해연이라고 요즘 급부상하는 신예 작가인데 오늘부터 개인전을 연대요. 안개를 주제로 한.”
“뭐라구?”

분명히 해연이였다. 안개처럼 사라졌던 그녀는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전시회는 성황이었다. 입구에서 사인을 해주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녀였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는 오래전 예수가 그려진 티를 입고 있었을 때보다 더 나를 빨아들였다.

“주해연 화가시지요?”
“네…….”
“여기는 이무영 목사님이고 저는 부인입니다.”
“네? 아, 예….”
“그림들이 정말 좋네요. 특히 입구에 있는 이 그림.”
“아, 그거요….”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신가 봐요. 안개를 배경으로 한 것이 구도도 좋고…… 마치 사진처럼 너무 실감이 나네요.”

그랬다. 나의 폴라로이드 속으로 쑤셔 박았던 안개 낀 아지트의 모든 사진들을 나는 다 해연이에게 주었던 것이다.

당시에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것 밖에 없었으므로. 그런데 그녀는 그 사진들을 모두 그림으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안개를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한때는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불쑥 아내에게 질문을 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혹시 자유공원 아세요?”
“그럼요. 제 고향인 걸요. 그런데 왜요?”
“억양이 거기 분들하고 똑같아서요.”
“아직도 그렇지요? 서울에 올라온 지가 꽤 됐는데도…. 그런데 화장실은 어디에 있지요?”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확인한 해연이와 나,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사모님이 무척 행복해 보이네요.”
“그 동안 어떻게….”
“목사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설교가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났던데….”
“해연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