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스타브로긴을 묘사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외면적인 용모와 색체만으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한 인물을 우리 앞에 열어보이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떤 개성을 지닌 인물의 내면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외형적 묘사보다는 인물이 뿜어내는 계음 같은 것, 색조라든가 음영 같은 묘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묘사를 통하여 스타브로긴에 대한 은밀함과 난해성을 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모든 구비된 것들을 외부로만 발휘하면서 내면의 움직임은 전혀 포착할 수 없게 만드는 기법이랄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이 진전되기 전까지는 전혀 그 인물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작가의 의도 말이다.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혁명의 바람에 휩쓸려가며 환호하고 광분하는 러시아이지만 사람들의 내면은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허무와 불안과 욕망과 기대가 복잡하게 엉키어있음을 보여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같은 우리들의 추측은 스타브로긴이 허무에 사로잡힘으로서 구체화된다. 그의 허무감은 허무사상이 아니라 ‘허무’ 바로 그 자체에 빠져버림으로 인한 절망적 허무감이다. 인간이 허무 사상에 빠지는 경우는 그 허무를 성찰할 여유를 지닌다. 허무 사상은 허무감 때문에 가치가 전도되게도 만들고 악을 행하도록 미혹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허무에 대한 관심이요 성찰이며 그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허무 그 자체 속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관심과 흥미 자체가 존재하지 못한다. 허무 속에서 가치란 원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타브로긴이 허무에 빠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내면 가치와 인간됨을 나타낼 생생한 묘사, 즉 계음이나 색조나 음영 같은 묘사는 필요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론가 윌린스키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 도스또옙스끼는 네쟈예프 사건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만든 러시아의 현실을 스타브로긴을 통하여 설명하려하였다. 그러니 스타브로긴은 도식화된 상징적 인물이어야 했다. 그는 당시의 러시아의 황폐한 불모의 정신풍경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좋은 환경과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병든 사회에서 병든 문명의 독을 마시고 그로 인한 권태와 허무에 빠져든 인간에겐 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늪처럼 병든 사회는 병든 문명을 만들고 성경 이름 같이 병든 문명의 끝은 허무의 늪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발버둥치면 칠수록 깊이 빠져들어 간다.

예수께서 갈릴리 맞은편에 위치한 거라사인의 땅에서 만난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였다.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장소인 묘지에 그가 살았다 함은 공동체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맛보는 작은 즐거움도 누릴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사인과 허무에 사로잡힌 스타브로긴과 같은 사람은 신의 창조의 섭리와 질서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도스또옙스끼는 스타브로긴을 통해 러시아의 지성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광분하지만 결국 그들은 내면의 허무 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음을 암시한다. 스타브로긴은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러시아의 지성의 내면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악령은 그 사회의 정신 풍경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