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선배의 졸업식이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속을 털어놔야 될 것 같아 어느 날 나는 그 형에게 나란 놈이 어떤 자인지를 죄다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는 원체 입이 무거워 내가 입 밖으로 쏟아놓은 어느 것도 다시 내 귀로 되돌아오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형을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사진 동아리에서 익힌 기량을 형의 졸업식에서 마음껏 발휘해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 형은 사망자 명단에 끼어있었고 나는 실종자 명단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딱 한 사람이 허망하게 내 곁을 떠난 날이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실종된 날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나에게서 실종된 날이었다. 나의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형, 언제나 내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던 형은 결국 그런 식으로 나에게 대답을 해 준 것인 지도 몰랐다. 한번 네 맘대로 살아보라고. 따라서 나는 한껏 자유로워져야만 했다. 부모님에게는 나보다 더 영민하고 잘난 동생들이 둘씩이나 있으니 이왕에 죽은 거나 진배없는 목숨, 그 정도의 자유는 누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손에는 카메라가 있었으므로(물론 최고급이었다.) 나는 영 돈이 궁할 때는 셔터를 누르면 그만이었다. 폴라로이드라 즉석에서 현찰이 들어와 그런 대로 요긴했다.

<안개: 헤르만 헤세로 기억된다.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이라고 시작되던 시, 나에게는 가끔씩 이 시구가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특히 누군가와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은 날이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정말 오랫동안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과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일이다. 그건 마치 아끼는 그릇일수록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혹시 금이라도 가면 어떡하나. 너무나도 깨지기 쉬운 게 인간인데…. 그럼 천지에 나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정녕 없단 말인가. 그토록 대화의 상대는 없단 말인가. 아니다. 있다.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언제나 신비감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아, 저기 또 안개가 몰려온다. 또 다시 안개가…. > 

알고 보니 전도지였다. 처음에는 안개 속에 가려 잘 몰랐었는데, 며칠 후 내 발밑으로 굴러 들어온 것을 주우니 그랬다. 교회 이름과 약도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얼마나 많이 뿌렸던지(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버려졌던지) 벤치에 앉아 있는 내 발밑으로 성가실 정도로 많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중의 하나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잠이 들었다. 또다시 축축해지면서 한기가 돌았다. 이번에도 새벽이었다. 나는 전과 똑같은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이렇게 지내는 것이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다른 방도를 궁리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부랑자에게 있어서 병치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몇 번의 체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필름으로 안개 낀 공원을 마구 찍어 댔다. 그 전도지의 내용대로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의 주인공이 되어 몇 장 남지 않은 필름에 나의 안개 낀 아지트를 쑤셔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에 내가 또 연루되어 본격적으로 안개 속을 헤매기 시작한 건.

평상시 나에게는 신앙 운운하는 말보다 더 신빙성 없게 정착된 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도 처음에는 순진하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언젠가는 나의 것이 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러나 언제나 아니었다. 그건 다만 픽션에서나 써먹을 법한 말장난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 말에 전적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눈앞에서 씩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좋아하는데 한 장 찍어 주실 수 있으세요? 안개를 배경으로….” 
“예, 예… 마침 마지막으로 한 장이….” 

나는 선뜻 그녀의 요구에 응하면서 잠시 이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초면에 이렇게 당돌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노래 한번 들어보실래요? 오늘 같은 분위기와 딱 어울리지요?” 

그녀는 자기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뽑아 아무런 스스럼없이 내 귓속으로 밀어 넣었다. 모처럼 느껴보는 인간의, 아니 여자의 체온이었다. 

“아, 이 노래는…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가 내 입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때 밤낮 없이 읊조리던 <미스티(Misty)>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