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던 날, 나는 사라졌다. 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종자 명단에 버젓이 내 이름이 끼어 있었음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나서라기보다도 마침내 지금까지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제껏 살아온 나와는 영 딴판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지덕지했다.

비로소 나에게는 주소도, 주민등록번호도, 아이디도 사라져 주었다. 물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도저히 나를 증명할 길이 없었으므로 세상과 부딪힐 때마다 번거로웠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나이기에 세상이 오히려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짜릿하면서도 쏠쏠한 재미였다.

과연 이 세상의 사람들 치고 이런 특권을 누려 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궤도에서라면 절대로 누려 볼 수 없는 혜택이었다.

실종된 나는 바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88고속도로를 건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반대 방향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실종자는 이내 부랑자가 되었다. 잘못 발음하면 불량자로 들리기 쉬운 부랑자. 나는 그 명목이 점점 훈장처럼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일탈이라고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고작해야 반장이나 회장밖에는 해보지 못한 나에게 이건 또 다른 나를 오지게 누려 볼 수 있는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우연하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 넝쿨을 붙잡고 점점 더 바닥으로,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설마 했었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나에게 잘 맞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삶이 또다시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건 내가 이런 글과 부닥치면서부터였다.

<안개: 헤르만 헤세로 기억된다.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이라고 시작되던 시, 나에게는 가끔씩 이 시구가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특히 누군가와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은 날이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정말 오랫동안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과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일이다. 그건 마치 아끼는 그릇일수록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혹시 금이라도 가면 어떡하나. 너무나도 깨지기 쉬운 게 인간인데…….

그럼 천지에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정녕 없단 말인가. 그토록 대화의 상대는 없단 말인가.

아니다. 있다.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언제나 신비감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아, 저기 또 안개가 몰려온다. 또 다시 안개가…….>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딱 한 번만 읽고 모른 척 하기에는 너무나도 강인한 흡인력으로 나를 빨아들였던 것이다.

단 한 구절, 예수 그리스도 운운하는 것만 뺀다면. 예수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신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세상에 없는 건 무엇이든지 신비의 베일로 감쌀 수 있으니까.

안개였다. 정말 안개가 혼곤하도록 자욱한 날이었다. 시계(視界)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는 점점 더 나를 칭칭 감고 있었다.

태어나서 그런 안개는 처음이었다. 그때가 초가을이라 그럭저럭 벤치에서 밤을 넘기고 있었는데 안개를 등에 업고 점점 더 포복해 들어오는 한기에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안개와 뒤엉킨 오한에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무엇인가와의 마찰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제일 만만한 게 나무였다. 나무, 나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 나는 나무에다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점점 세게, 점점 강하게 그러다가 이내 나무를 확 껴안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나무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던 종이에서 나에게로 뚝뚝 떨어지는 글이 바로 헤르만 헤세로 시작되는 <안개>였다. 그 후 <안개>는 내 눈에 마치 안개처럼 오락가락했다.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 가끔씩 스멀스멀 나타나는 것이었다. 분명 그 나무에서는 없어졌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확 떼어낼 수도 있을 텐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날이 갈수록 그저 부대낄 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 생각에 나는 습해져 갔다. 지금 내가 만끽하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바로 그런 삶을 자축하느라 지하철 참사도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는데…….

그날 나는 졸다가 엉겁결에 바로 전(前) 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내가 아닐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획득할 수 있었다.

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비애감보다는 짜릿함이 더 컸었다.

생각지도 않던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보다도 더 강렬한 전율이었다.

우리 집은 3대에 걸친 장로 집안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 어떤 묵계가 철조망처럼 나를 가두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명성에 딱 맞아떨어지는 분위기 말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우리 집안의 그것은 분명히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었다.

그래도 굳이 자유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그건 가두리 양식장의 잉어들에게 허용된 분량 정도의 자유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나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가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기성세대들이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금지된 장난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당찬 본심은 현실적으로 볼 때 단지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청춘은 녹슬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속사정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늘 착실하고 고분고분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르신들이 보기에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 없는 믿음직한 젊은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