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머니 보기를 간절히 소원했으나 어머니는 원수라고 이를 갈면서 등을 돌리는데 이를 어쩔 것이냐. 언제부터 두 분 사이가 이렇게 버그러졌는지 모르겠다. 그런 속내도 모르고 아버지는 며느리의 손을 잡고 늘어진다.

“너에게 이제 고백하는데 통장에 돈이 꽤 많이 있다. 집을 살 수도 있는 돈이다. 그 돈으로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사고 거기서 네 어머니랑 신혼살림을 차릴 것이다. 내 말 알아듣겠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제 아버지는 집에 가실 수 없어요. 지금 기저귀를 차고 있거든요. 등창도 나서 매일 의사가 치료해야 하는데 어떻게 아파트를 사서 신혼살림을 차려요.”

“나 할 수 있어. 화장실도 나 혼자 갈 수 있어. 밥도 내가 할 거야. 시장도 내가 손수 직접 봐올 거야. 그러니 어서 통장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금붙이도 꽤 많다.”

“아버지는 이제 집으로 갈 수 없어요. 어머니가 허리가 휘어서 일을 못해요. 어머니도 기저귀를 차고 병원에 있었어요. 지금 작은 아들네 가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어머니랑 다시 사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그는 두 손으로 짧은 상고머리 백발을 북북 쥐어뜯다가 나중에는 부둥켜안고 신음을 토했다.

“내 돈, 내 돈을 찾아야한다. 어떻게 모든 돈인데. 일생을 두고 모은 재산이다. 그 돈을 찾아야 해. 내 통장이 내 생명이야. 그걸 위해 내 일생을 보냈는데 이를 어쩌지. 내 통장, 내 통장…… 내 돈을 찾아야 해. 얼마나 아끼면서 모든 것인데…….”

옆에서 보다 못한 간병인이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채순에게 속삭인다.

“헛소리를 하시는군요. 망상에 빠져든 것이에요. 노인이 되면 일생 이루지 못한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마음에 담지 마세요.”

답답해진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채순이 막내시동생 집에 전화를 했다. 마침 동서가 받았다.

“아이들이 유럽여행을 갔다면서 돌아왔나? 대학도 3월이면 개학할 때가 되었잖아.”
“우리 두 아이가 여행간 걸 어떻게 아셨어요?”
“시누이가 전화해서 알았지. 왜 그렇게 놀래.”
“사실 형님 혼자서 아버님 병원비를 다 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여행간 걸 말하지 못했어요. 형님 혼자 모든 걸 감당하시는데 저희 아이들이 외국여행을 갔다고 하면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잖아요. 아이들이 여름방학 내내 알바를 해서 모든 돈으로 여행 간다고 하니 막을 재간이 없더라고요.”
“아이들이 번 돈으로 간다는데 누가 막겠나. 여행도 한 철이야. 그 나이 지나면 가고 싶어도 못가는 것이니 잘 했어.”
“아버님은 어떠세요?”
“통장타령이 아주 심해. 엄청나게 많이 저축한 통장이라고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어. 치매초기 단계라 별별 망상을 다 하는 모양이야.”
“노인이 되면 다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동네 노인들도 전부 그래서 병원으로 가더라고요. 헛소리를 많이 해서 가족들이 참지를 못하는 거지요. 노인들의 그런 소리를 자식들이 다 믿으면 형제간에 결별하고 싸우는 걸 많이 봤어요.”

작은동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러나 그녀가 병원에 갈 적마다 그는 통장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 통장을 찾아야 하니 집에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걷지도 못하면서 침대를 내려오려고 발버둥을 쳐서 채순이 혼자 씨름을 하다못해 간호사들이 달려오고 남자 간병인이 매달리는 소란이 반복되었다.

보다 못한 수간호사가 그녀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 통장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사연이 있는 것 같군요. 저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때는 현장에 모시고 가서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노인들은 이러다가 마는 법인데 이분의 경우는 무엇인가 얽힌 것이 있어서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 정신적 안정을 잃고 저렇게 날뛰니 보기에 아주 딱합니다.”

걷지도 못하는 분을 앰뷸런스를 불러 시골집에 오가는 것도 그렇고 참으로 난감했다. 이러도 저러도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두 손을 맞잡고 천정을 향해 방아를 찧듯이 쿵덕쿵덕 하면서 통장, 통장, 내 돈, 내 돈만을 외쳤다. 하긴 침대만큼의 넓이에 갇힌 몸이니 다르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잖은가. 나중에는 입이 바짝 말라붙어 입 언저리에 우유가 말라붙은 것처럼 허옇게 되었건만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나중에는 입술만 달싹이면서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가 되도록 몸부림을 쳤다.

날이 갈수록 그의 목은 가라앉아서 그저 입술만 움직였다. 소리가 안으로 꼬꾸라져 들어갔다. 눈에는 눈물이 흥건하게 고였고 흐린 눈을 들어 며느리를 쳐다보는 표정이 통장만을 찾아 헤매는 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일과는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거시기를 주무르는 일과 통장과 돈을 찾아달라고 입만 달싹이는 것이 전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