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동서네 두 아들이 유럽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돈이 어디 있어서 유럽여행을 갔지? 두 아이 비행기 값만도 몇 백만 원이 넘을 터인데.”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채순이 옹알거리자 피곤으로 흰자위까지 핏빛이 도는 남편이 한마디 한다.

“살만하니까 어머니도 모셔가고 자식들 세계여행도 시키고……좋은 소식이야. 우리는 부모 돈 대느라고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아무 것도 못했지만 동생네라도 그러니 좋구먼.”

“그래도 항상 돈이 없다고 구시렁대던 동서예요. 부모님에게 주는 돈을 철저하게 아끼면서 한 푼도 내놓지 않더니 갑자기 여행을 가니 이상하지요. 부모를 모시니까 축복이 마구 비처럼 쏟아지나 봐요.”

“벌려놓은 장사가 이제야 돌아가는 모양이군. 한 사람이라도 형제 중에 잘 사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남편의 손마디에 박힌 못이 반지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옹이가 굵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부모와 형제 뒷바라지로 애를 먹었는데 반쪽 부모라도 막내가 맡았으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채순은 기쁨의 숨을 내쉬었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느긋하게 일일드라마라도 보면서 쉬려고 막 누우려는 참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자꾸 집엘 가겠다고 병원을 탈출하려고 기어나가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무얼 가지러 간다고 야단인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채순은 환자가 갈아입을 내복과 알사탕봉지를 싼 보따리를 들고 나섰다. 병실이 따뜻해서 다른 환자들은 환자복으로 만족하는데 유난히 추위를 타는 시아버지는 내복을 입히라고 성화였다.

“내일 가보지 그래. 노인이 하는 일이 늘 그렇지. 그냥 안정제주사라도 놓고 밤에 주무시게 하라고 해.”

몸이 퉁퉁 부어서 노래진 얼굴로 나서는 아내를 보다 못해 남편이 한 마디 한다.

“그래도 얼마나 힘이 들면 간병인이 전화를 했겠어요.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나보지요.”

병실은 노인들 특유의 욕지지 나는 퀴퀴한 냄새가 울컥 풍겼다. 문 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던 그가 반가움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한다. 며느리가 올 걸 알고 기다리고 있던 눈치였다.

“네가 올 줄 알았다. 우리 어서 집으로 가자.”
“아버지, 지금 집에 갈 수 없어요. 거기 가야 아무도 없거든요. 텅 비어있어요.”
“네 어머니가 있잖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어서 가야 한다. 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미치겠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우리 부부가 떨어져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순간 채순은 말이 막혔다. 어제 전화한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어머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병실의 환자들이 모두 항의를 해요.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데 한번쯤은 와보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채순의 말에 시어머니는 금세 화난 목소리로 치받았다.

“그 웬수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 지긋지긋한 사람이다. 나를 얼마나 부려먹었는지 아니. 지금도 날 종처럼 시켜먹으려고 그러는 거다.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일생 소처럼 부려먹다가 이제 떨어져있고 보니 아쉬운 거다.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60년을 함께 산 남편에게 그게 무슨 말이세요.”

며느리가 기가 막힌다는 음성으로 다그쳤다.

“일생 나를 고생만 시킨 사람이다. 다시 그 꼴을 내가 본다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돈도 벌지 못하는 주제에 나만 고생시키고 밥만 해달라고 해서 식모로 일생 살았다. 네가 매달 생활비를 내 손에 쥐어주었어야지 꼭 네 아버지 손에 주니 돈도 마음대로 못 쓰고 난 완전히 개돼지만도 못한 짐승으로 살았다.”

결혼해서 이 집안에 들어와 처음에 생활비를 어머니 손에 넘겼으나 어찌나 헤프게 쓰는 지 한 달 쓸 돈을 일주일 만에 다 써버리고 다시 손을 내미니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손에 쥐어준 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그건 낭비가 아니다. 계산을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달 치 생활비로 참기름을 대두 두 병이나 사고 소고기를 10근, 그리고 돼지고기 10근을 들여놓고 나머지는 당신이 입을 옷가지와 자잘한 장신구를 사면 고만이었다. 이러니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절대로 어머니의 손에 돈을 맡길 수가 없었다.

“아내가 남편 밥을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여기서 막내며느리 밥을 얻어 먹어보니 얼마나 편한지 이제야 나는 살 것 같다. 다시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