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를 따라 앰뷸런스에 실린 기억이 가뭇하게 살아난다. 일본 순사의 취조실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 깊은 평안이 임한다. 뭉게구름 위에 실린 듯 전신에 힘을 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비처럼 날렵하게 끝없이 깊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른다.

두메산골 충청도 얼음골을 벗어나야 한다. 문강을 지나 충주로 해서 서울로 가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괴나리봇짐을 지고 봄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봄날 훌쩍 산골을 빠져나왔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진달래가 베일 뒤에 숨은 요염한 여인처럼 알찐거렸다.

도시의 소음과 매캐한 공기로 인해 몸이 짠지처럼 절도록 일을 했으나 손에 쥔 것이 없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지게를 지는 짐꾼이 되어 물건도 배달했으나 손에 남는 것이 없다.

그런 와중에 19살 난 장남이 기댈 수 있는 거목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하늘처럼 뻥 뚫린 광활한 땅위에서 할 수 있는 짓을 다 해보았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장남인 큰 아들은 무언가 달랐다. 아무튼 이아들만 붙들고 늘어지면 모든 것이 만사 오우 케이가 될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건 증명이 되었다. 하늘 속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산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시냇물처럼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붙들 수 없지만 요 자식 하나만 붙들고 늘어지면 살아갈 길이 보였다. 결사적으로 붙들기로 했다. 아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까지 치솟은 믿음직한 기둥이었다. 등으로 아무리 비벼대고 두드리고 걷어차도 끄덕하지 않는 듬직한 바위요, 거대한 산이었다. 하늘은행이었다. 가서 눈만 부라리고 손을 치켜들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세상을 헤집고 다녀도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는데 오직 이 아들만 움켜잡으면 만사가 다 되었다. 돈을 버는 길도 이아들을 통해서 하면 된다는 확신이 들자 모든 짐을 전부 큰 아들에게 맡기고 아내만을 데리고 농촌으로 독립을 했다. 생활비를 몽땅 받아내고 농사비도 받아내고 요리조리 핑계를 대서 돈을 앗으면서 통장에 돈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신바람이 났다.

과일은 돈이 되질 않는다. 뒷산의 복숭아와 자두나무를 전부 잘라 파내버리고 흰 콩을 심었다. 10년 이상 자란 과일나무를 파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거리면서 그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 나무를 파내고 그 자리에 흰 콩을 심었다. 가을에 20가마를 추수하여 모두 내다 팔아서 그 돈을 몽땅 통장으로 넣었다. 자꾸 자꾸 통장의 돈이 불어났다. 그 재미가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경운기를 사는 돈은 큰 아들의 몫이다. 비료를 사는 것도 큰 아들의 몫이다.
며느리인 채순의 까칠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 애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비법을 알아서 하늘의 구름이라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에게는 그런 숨겨진 카드가 없다. 그러니 아들내외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었다.

장남이 공부한다고 고학해서 사드린 책을 아들이 외출한 사이 몰래 헌책방에 몽땅 내다 팔았을 적에 손에 들어온 몫 돈을 보고 놀란 것이 이런 삶의 시작이었다. 울타리를 친다고 큰돈을 아들에게 요구했을 적에 며느리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게 괘씸해서 일수를 얻어다 썼더니 어쩔 수 없이 며느리가 그 돈을 몽땅 갚아주었다.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들에게 매달리는 것이란 점도 살아가면서 날마다 터득한 지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들과 며느리를 조정하는 기술만 날마다 연구하면 되었다.

“돈이 있으니까 빚을 갚아주고 생활비도 주고 밑에 동생들도 기르는 것이 아닌가. 저희들이 돈이 없다면 무슨 수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이건 그가 늘 혼자서 뇌까리는 말이다. 세상에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아들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면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단단한 거목처럼 아들도 며느리도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말이 없었다. 이들은 비탈진 따비밭을 가는 소처럼 순했다. 다랑논을 가는 황소처럼 헉헉거리면서 어깨살을 뭉클뭉클 내보이면서도 앞만 보고 진군하는 탱크 같았다.

시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킨 다음날 이번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해서 나도 병원으로 가야겠다. 영양제 주사도 맞고 이제 나도 늘그막에 호강을 하고 싶구나.”

채순은 시어머니를 같은 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다.

“네 아버지는 꼴도 보기 싫다. 같은 병원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병원에 가겠다. 이제야 너희들에게 말하지만 네 아버지는 나를 발샅에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두 분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입원시켜놓고 이리저리 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작은 며느리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 며느리를 붙들고 시어머니는 간절하게 매달렸다.

“나를 집에 데려다 다오. 집단속을 잘 해놓고 오지 않아서 그런다.”

채순은 그러잖아도 두 분이 살던 집에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나 해서 여러 번 문단속을 하러 다녀왔기에 걱정 말라고 시어머니를 다독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