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봐야 한다. 너는 백번 가도 모른다.”
“일러주시면 단속을 잘 할 터이니 그렇게 하세요.”
시어머니는 큰며느리를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옆으로 밀어놓고 병실에서 빠져나와 막내며느리를 데리고 득달같이 살던 집을 다녀와서는 느닷없이 작은 아들집으로 간다고 한다.

“이젠 밥도 해먹기 싫다. 네 아버지는 큰애가 맡고 나는 여생을 평안히 지내고 싶구나. 작은 아들이 나를 맡는다고 하니 나는 그리로 가련다.”
반세기가 넘도록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을 어찌하고 혼자서 작은 아들 집으로 가려고 하는지 걱정이 되어서 채순은 그리 말고 살던 집으로 가시자고 했으나 시어머니는 고개를 심하게 흔들었다.
“아무래도 어머님이 작을 아들네서 살 것 같군요.”
일생 많은 식구들 때문에 허리가 휜 남편이 그녀의 말에 대꾸가 없다.
부모님을 봉양하느라고 허리가 휜 그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묵묵히 황소처럼 굄대인 가장으로 살아온 탓인지 아내에게도 바위처럼 입이 무겁다.
새벽녘 남편이 어깨를 심하게 잡아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편이 어서 일어나라고 성화였다.
말이 없는 남편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해서 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무래도 거액을 모았을 것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어. 그 돈을 빈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
“무슨 그런 꿈을 꾸세요. 돈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늘 손을 내밀면서 이악스럽게 굴었을까요.”
“지금까지 당신에게 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속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했어. 콩 농사만도 큰돈이라고. 그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우리에게 일일이 다 타서 쓴 것이 이상해.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어서 가서 통장을 찾아야겠어. 경운기도 팔아서 꿀꺽했고 무엇이나 몽땅 쇠붙이를 먹는 고려 말의 괴물처럼 아버지, 어머니는 좀 이상한 인생을 사셨어. 아버지는 이제 병원에서 나오지 못해. 똥오줌 싸는 노인이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아무래도 통장관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
40년이 넘도록 생활비를 드리고 일일이 세세하게 살아가는 일에 드는 돈을 다 댄 마당에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느냐고 툴툴대면서 남편을 따라나섰다.
“당신은 정말로 아버지가 거액의 통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 짐작이 맞을 거야. 앞집 노인의 환갑잔치에 낸 축의금도 따로 타내갈 정도로 아버지는 돈을 모두 우리에게서 타갔어. 시골집 고치는 것도 일일이 다 우리 손에서 뜯어갔잖아. 그 분들이 돈을 어디에 썼겠어.
하다못해 전기밥솥을 사도 드린 돈에서 더 나갔다고 오만원이라도 더 받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쌀을 한 가마씩 사달라고 했잖아.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받아가고 쌀은 쌀 대로 사달라고 하고……. 그리고 무슨 쌀을 두 분이 한 가마씩 먹어. 다 우리를 통해 돈을 벌려는 수단이었지. 아마도 엄청난 돈을 통장에 모아놓았을 거야.”
저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시골집을 향해 새벽안개를 가르며 달렸다. 그 때 시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기름통에 일 년 동안 쓸 기름 12드럼을 사놓고 왔는데 아까워서 어쩐다지. 한 드럼에 18만원씩 주고 샀으니 200만원은 받아야겠다. 보일러도 새로 하느라고 돈이 들었지만 그건 고만 둬라.”
채순이 처음으로 바락 화를 냈다.
“그 기름을 제가 쓰면 억울하신가요?”
“왜 화를 내느냐. 내 돈인데.”
“기름을 짜내듯이 모든 돈을 뜯어가는 우리는 어머니의 자식 맞아요.”
“일생 그렇게 해오고 갑자기 왜 그러니. 여직 잘 해오다가 이제 우리 늙은이 몇 년 더 산다고 불효를 하려고 그러느냐. 성경에도 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잖니.”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딱 끊었다.
새벽 어스름에 잠긴 텅 빈 집은 썰렁했다. 몸뚱이가 빠져나간 누에고치처럼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당신 여기 그렇게 많이 드나들었으면서도 부모님이 귀중품을 어디에 두는지 정말 몰라.”
“거실 천정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거기에 금붙이랑 현금을 둔 것으로 알아요.”
남편은 의자를 거실 천정 한 구석에 가져다 놓고 천정합판을 들어올렸다. 쥐똥이랑 먼지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천정 안쪽으로 손을 넣고 휘저었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간호사들의 구시렁거림에 주눅이 든 채순은 병원에 가면 언제나 머리를 들지 못했다.
“노인이 무슨 힘이 그리 센지 장정들이 덤벼도 휙휙 날아가요. 아마도 젊은 시절엔 이름난 씨름선수였던 것 아닌가요.”
“제가 와있는 시간만이라도 손발을 풀어놓으면 안 될까요?”
그러자 수간호사가 조용히 한 구석으로 그녀를 불렀다.
“노인이 아직도 수음을 하는지 거시기를 주물럭거려서 문제예요. 아마도 성생활이 굉장히 강했었나 봐요. 똥을 싸놓고도 그걸 거시기와 함께 주무르니 묶을 수밖에 없어요.”
채순은 묶인 그의 손을 울적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는 아주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가야, 너 돈 가진 것이 없니?”
“여기서 무슨 돈이 필요하세요?”
“쓸데가 많다. 담구석이 허물어져서 보수해야 하고 좋은 감자씨앗을 미리 농협에 선불해야 봄에 제일 먼저 차례가 온다는구나. 그러니 돈을 다오.”
“아버지는 이제 농사를 짓지 못해요. 여기 누워서 무슨 농사를 짓는다고 그래요.”
그러자 기가 푹 죽은 그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죽을 듯이 귀를 틀어막았다.
“빚쟁이들이 야단이다. 돈 달라고 야단이다. 네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나는 맞아 죽는다. 제발 나를 살려다오. 돈을 다오. 돈을 내 손에 쥐어다오. 일수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간호사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어서 가라고 턱짓을 한다. 채순은 쓸쓸하게 그를 뒤로 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