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 언니네 집에서 나와 오랜만에 동네를 걸어보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 장자못 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엔 대형 성탄 트리가 수백 개의 전등을 깜박이며 서 있다.

곧 크리스마스다. 날마다 겨울은 따뜻해지는데 성탄은 썰렁해지는 분위기다. 따뜻한 겨울은 운치가 없다. 눈도 없고 바람도 약하다. 나는 데면데면한 얼굴들로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따뜻한 겨울바람만큼 김빠진 연인들을 본다.

목숨 건 사랑은 로미오의 나이에나 하는 것인가. 그러나 교복을 입은 십대들이 서로 덜 여문 몸을 서로 치대며 걸어가는 것은 꼴불견이다. 성탄은 다가오는데 캐럴도 없다. 가끔 경박한 목소리들의 캐럴이 코믹이라는 이름 아래 울려 퍼지지만 그거야말로 시즌 공해다.

내 앞으로 시추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중년의 부부를 본다. 그들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시선은 한 곳을 향한다. 여자가 공원 가에 세워진 시어들을 감상하느라 발걸음을 멈추면 남자도 서고 여자가 시를 읽으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뒤를 따라 가던 나도 짐짓 호수를 감상하듯 느리게 걷는다. ‘아장아!’라고 불리는 시추가 내 쪽으로 킁킁거리며 다가오자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놀랍게도 그들은 시추와 닮았다. 강아지가 주인을 닮는다더니, 아니 그것보다 금슬 좋은 부부는 서로 아주 많이 닮는다더니 나직하게 소곤대던 중년의 부부는 강아지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저녁 무렵 제일 먼저 나타나는 금성이 반짝거린다. 금성의 주변으로 아슴푸레한 빛 하나가 금성을 향해 빛을 내고 있다. 나의 운명에 이제 사랑이란 없는 것일까. 나의 그리움처럼 희미하게 바래져 아슴아슴해진 것만 같은 저 작은 별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아무리 따뜻해도 겨울바람이라고 다들 옷깃을 여민다. 공원을 산책하는 모든 커플들의 사이가 가까워진다.

‘니 외할머니는 25세에 혼자되셨고 느이 아버지 돌아가신 게 내 나이 33살 때다……’ 엄마의 탄식은 대물림되어 나의 사랑은 21살의 나이에 달랑 6개월의 사랑병을 앓고 끝나 버렸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수위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늘 받는 인사인데 오늘은 나도 같이 인사를 하며 ‘장자공원에 사람이 많네요’ 하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한다. 수위아저씨는 당황한 눈치다. 엘리베이터에 앞집 여자가 같이 탔다.

“어디 다녀오세요?”

내가 먼저 물었다. 앞집 여자도 역시 놀라는 표정이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동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살갑게 다가오는 이들이 귀찮아 늘 눈을 감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바람같이 내리고 타곤 했다. 그럼에도 자주 부딪히게 되는 앞집 여자와 아래 위층 사람 정도는 저절로 풋낯이 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면할 수 도 없어 나는 늘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을 감았다.  앞집 여자는 두 손에 내용물이 가득 찬 쇼핑비닐을 들고 있다.

“밤에 마트 다녀오시나 봐요?”

역시 내가 먼저 물었다.

“네,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예요. 내일 시어머니 생신을 우리 집에서 하거든요.”

여자는 혜자 언니처럼 동그란 삶을 부지런히 살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서자 여자가 말한다.

“내일 점심 때 손님 치르거든요. 저녁 때 건너오세요. 이웃에 살면서 제가 너무 소홀했어요.”

여자는 너무나 겸손하게 말한다.

“어머, 고맙습니다. 근데 내일 오후에 제가 일이 있어서 못갈 거 같아요. 다음에 언제 같이 식사해요. 들어가세요.”

사실 내일 오후에 미리 선약은 없다, 다만 한 번에 빗장을 다 열어 줘 버리면 나는 분명 사람멀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집 여자가 혜자 언니를 많이 닮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