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좌에서 강의하고 있는 이어령 박사. ⓒ이대웅 기자

대학에서 이렇게 기립박수 받는 일 잘 없다. 대학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남들이 안 가르치는 걸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안 되고 생각해야 한다. 생각으로 안 되고 창조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했다. 돈이 없어서 남들 하는 정상 코스를 밟지 못했다. 대학은 안 나왔지만 졸업식 가서 강의를 많이 한 사람이다. 교수들이 말 못하는 것 말한다. 오늘날 CEO 중 창조적 상상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그의 연설은 절대 학문적인 연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생들 피를 끓게 한 것은 그의 유명한 ‘stay hungry’. 그리고 약삭빠른 사람 되지 마라. 우직하게 꿈을 쫓아가라. 여자친구가, 부모들이, 남들이 원하는 정형화된 인간 되지 마라. 편한 길을 두고서도 어려운 길을 가고, 금세 돈을 벌 수 있지만 다시 꿈을 쫓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 자기가 했던 말도 아니고 히피들이 조그만 잡지 마지막 장에 남긴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박수를 치고, 스탠포드 대학생들이 당신하고 일하고 싶다고 붙여놓고 그 자리에서 입사원서를 쓴다.

제가 인문학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보통 CEO 였다면 새로운 미디어 혁명, 옛날과 다른 새로운 사이버 세계를 만드는. i로 이어지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왔다. 그는 인문학자였다.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지 디지털을 연구하지 않았다. 똑같은 것을 만들어도, 똑같은 태블릿PC, 똑같은 스마트폰이더라도 왜 젊은이들이 잡스의 제품에 줄을 서겠는가. 그는 상품을 만든 게 아니라 그의 말대로 끝없이 새로움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열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학문으로 검증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가 상대성 원리 만들었을 때 당시에는 증명할 수 없었다. 결국 일식이 일어날 때 아프리카에서 증명이 됐다. 지금 쓰는 GPS는 미묘한 오차 줄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만들어냈다. 상대성 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 이를 이용해서 GPS 쓸 수 있다. 당시엔 지구의 시간만 필요하지 우주의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것은 증명이 가능하고, 여러분들 호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증명됐다.

하지만 인문학은 증명할 길이 없다. 칸트, 헤겔, 철학자들, 역사학자들, 제각기 다른 걸 쓰는데 숫자로 증명할 수 없다. 말로도 정확하게 논리로 할 수 없다. 점수가 똑같은 것은 인문학이 아니다. 대학 인문학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시장 지향적인 나라, 사회, 조직에서는 배제돼 인문학 전공자들이 미국의 경우지만 꼭 20-30년 전에 비해 교수, 학생들이 반토막 났다. 인문학을 하지 않는다. 취직이 안 된다. 연구비가 안 나온다. 여러분들도 인문학 아니고 신학 아니고 만약 다른, 하다못해 만화 그리는 애니메이션만 했어도 정부에서 연구비 나온다. 그런데 시 연구한다, 중세 언어 연구한다 하면 절대 연구비 안 나온다. 그런 연구비 줄 부서도 없다.

정부가, 국가가 사실 인문학에 개입해도 안 된다. 저는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소련이 붕괴했다. 문화정책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니 문화부 정책 자체가 없어졌다. 국가가 문화를 다 했기 때문이다. 무용하라고 해서 무용하고 그런 사회주의…. 그러니 자기들 문화부를 어떻게 만들까 싶었는데 한국이 문화부 만들어지니 기자들이 왔다. ‘당신의 문화부 비전이 뭡니까. 문화부는 왜 만들었습니까.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어떻게 끌고 나가겠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문화부를 10년 후 없애기 위해 장관으로 왔다. 문화부를 없애는 게 내 사명이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문화는 국가가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워낙 토대가 없으니 처음에 이렇게 하는 거다. 부력을 얻고 양력을 얻으면 스스로 글라이더가 날 수 있다.

정부가 문화에 일일이 간섭하면 안 된다. 이들이 너무 의아해서 ‘이유가 뭐요’. 단 한 가지.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가치는 투표인데, 시인을 투표로 뽑을 수 있나. 이렇게 쓸지 저렇게 쓸지 투표해서 정하느냐. 그림 그리는데 일일이 상의해서 그리느냐. 정신 영역과 권력 영역은 아주 다르다. 노래하고 춤추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은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창조력에서 나온다. 민주주의 논리도 예술, 문화에는 안 통한다. 여러분들은 투표로 모두 결정하지만 만약 소설가 순위를 투표로 정부가 매길 수 있나. 기업도 세금으로 전부 해서 어떤 회사가 최고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최고 작가가 누구인가. 노벨상처럼 누구를 주면 뜨지만 1등은 아니다. 등수가 없다.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학, 사회과학까지도 통계나 숫자로 표현되지만 인문학은 마치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물었다. 엄마 얼마나 사랑해? 사랑은 숫자가 아닌데, 다들 숫자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 모래 숫자만큼 사랑한다. 이렇게 꼭 사랑을 숫자로 얘기한다. 제가 대학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교수라고 했다. 환영이 아니라 자극을 주고 네오필리아(neophilia), 끝없이 생각하고 창조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지 이미 있는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전수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이화여대 떠나면서 고별 강연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실패한 교수지만 너희는 성공한 학생 될 것이다. 그런 역설적인 진리의 세계다.

최근 신문에서도 보셨겠지만 기독교인이 됐다. 저는 인문학으로, 글 쓰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로 자유롭게 살아왔다. 50년 넘게 지적 자유,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았다. 소위 자유인으로 평생 살아왔는데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친한 문학가들이 찾아와서,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면 좋은데 빈정대더라. 이 교수, 예수쟁이 됐다며? 그래서 말했다. 너는 욕쟁이 됐냐? 그러면서 말했다. ‘쟁이’ 되지 마라. 내가 당신을 욕쟁이라고 하는 게 잘못된 것처럼 예수쟁이 되지 마라. 프로가 되지 마라. 나는 예수를 믿어도 아마추어다. 그레이트 아마추어(Great amateur).

라틴어로 아마추어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한다에 명사를 붙인 게 아마추어. 그 다음에 한 말이 있다. 연애, 사랑을 하는데 프로하고 하고 싶으냐 아마추어하고 하고 싶으냐. 프로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 있나. 사랑이 뭔지 모르고 서툴고 이게 진정한 사랑이지, 그냥 프로가 돼서 능수능란하게 남자 비위 맞추고 하면 그게 직업 여성이지 애인이냐.

인문학자는 프로냐? 아니다. 창조하는 사람은 모른다. 프로는 다 알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는 걸 사랑하진 않고 더 사랑하는 게 있다. 골프를 친다고 하자. 골프 치는 재미로 골프를 치면 아마추어다. 내기골프나 프로골퍼 돼서, 우즈처럼 상금 탄다면 이미 이 사람은 골프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수단이 되고 골프로 얻어지는 다른 돈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학문 자체를 즐거워서 했다면 아마추어지만, 학문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면 프로다. 자본주의는 모두 프로가 되는 세상이다. 돈이라는 하나의, 모든 가치의 척도요 행복이요 유통의 가장 큰, 신이 죽었다고 한 니체의 신이 부활했다면 바로 돈이다. 이 세상은 돈이 안 생기는 건 안 되는 걸로 본다.

저는 문학을 했고 가장 인기없는 문학평론을 했죠. 돈 생각이 있었으면 절대로 국문학과에 들어왔거나 들어왔더라도 대학 교수는 되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스승님들은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여러분들의 스승이라는 한 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마추어다. 무슨 아마추어냐?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분들이시다. 교수가 되면서 돈을 벌 생각 하고 대통령 될 생각 하고 국회의원 될 생각 하면,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조직에서도 그런 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아무리 봐도 대학에 몸담는 지성인들은 1차적으로 돈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돈이 없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돈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문학이 무엇이며 창조적 상상력이 무엇이냐 할 때는 놀랍게도 시장주의에 대한 이야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불필요한 이야기를 1시간 가까이 듣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게 인문학이 아닌 혹시 다른 거라면, 시장주의 말이다. 오늘 제 얘기는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처럼. 어리석고 배고프라는 얘기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저를 보라. 제가 인문학을 했기 때문에, 염색 해서 젊어 보이지만 79살이다. 79살 먹은 의사가 계속 의사할 수 있나. 우리 집이 몰락한 집안이다. 제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법관, 의사 되고 뭔가 경영학과 들어가서 사장 되면 옛 영광 찾을 거다 하고 많은 친척들이 얘 하나만 잘 되면 일어설 수 있다며 대학 시험칠 때 전부 후원했다. 붙었다니까 소 잡았다. 가난하던 시절 판검사, 의사가 유일한 꿈이지 않나. 그러니 옛날 사람들이라 시대가 바뀔 때 판검사 의사 될 수 있는 학교 들어갔다니 동네 사람들 다 축하하러 왔다. 날 축하한 게 아니라 일종의 협박도 된다. 우리 가족들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는.

여기까진 잘 됐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뭘 배우냐고 물었다. 그때 난 당연히 문학 어렸을 때부터 했으니 국문학이요, 얼굴이 달라지면서 대학 간 사람이 아직도 언문을 배우냐. 영어, 독일어가 아니라 우리나라 말을 배운다니, 앞이 깜깜해지면서 소 괜히 잡았다고 하시고. 그때 ‘내가 왜 문학을 했을까.’ 처음으로 후회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문학소녀라 늘 글 읽어주시곤 했다. 인문학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어렸을 때 길에 나가면 다 인문학이었다. 사회학, 경제학이 아니었다. 웃고 사랑하고 악수하고 이게 인문학이다. 나머지는 경제, 정치학이지만 우리가 악수하는 것,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눈웃음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대상이다.

정말 한글을 알고 있느냐, 우리나라 문학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나. 인문학이 뭔지 실제로 짧은 시간이지만 해 보자. 일대 일로 인문학이 뭔지 알아보자. 여러분들이 인문학에 대해 뭘 아는지 증명해 보자. 어머니가, 너 돌상에서 쌀도 있고 돈도 있고 다 있는데 책을 집었단다. 붓을 집었단다, 자랑스럽게 얘기하셨다. 지금 같으면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다니 돌상에 스케이트날, 박찬호가 야구를 잘 하니 야구공, 이런 거 놓는다. 어머니에게 지금도 감사드리는 것은 대학에서도 밥 굶는, 아직도 우리나라 말을 배우냐 이런 말씀 안 하시고, 자랑스럽게 네가 책을 집었단다. 늘 책을 읽어주시고 했기 때문에 이 나이에도 여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때 쌀을 집었더라면 요새 농지가격이 얼마냐. 활을 잡았더라면. 80 먹은 사람이 뭘 하겠나.

그런 직업 나쁘다는 게 아니라 훌륭하시지만 인문학은 적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경쟁력도 없지만 오랜 시간 놓고 보면 다르다는 것. 그 많은 궁전들이 다 사라졌지만 아직 중세 때 성당은 관광해 봐서 알지만 살아있다. 제왕들 무덤에는 아무도 가질 않지만 보들레르, 랭보, 모차르트의 묘지는 형편없이 작지만 지금 가 보면 꽃이 끊일 날이 없다. 당시엔 권력이 기세가 당당했지만 지금은 이름도 모른다. 시인들에 비해 몇천 배 권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기억하지 않는데 그들이 언어로, 문학으로, 색채로 얘기한, 미켈란젤로, 로댕, 다빈치 이들 무덤에는 꽃이 놓여있다.

금이 왜 귀한가. 구리나 쇠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지만 금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언어, 선, 진리, 이런 것들은 시장주의에 있어서는 값어치가 별로 없지만. 교환가치도 사용가치도 소유가치도 없지만 생명가치는 최고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을 하고 법학을 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100세, 죽고 난 후에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남는다.

시장에서 직접 써먹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의학에도 임상이 있고 실제 의학 하는 사람 있는데 코흐 이런 사람이 탄저병 제일 먼저 발견했다.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세균을 새로 발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프리카나 사람들이 가지 못한 세계를 늘 여행하고 싶어했는데 부인이 잡아서 못 가게 했다. 자꾸 도망가려 하니 시골 좋은 곳에 병원을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도 계속 넓은 세계 꿈꿨다. 그때 현미경이 발명됐는데, 아내가 현명하다. 생일날 코흐에게 선물했다. 바깥 세상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현미경을 보니 작은 세계에도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현미경 앞에 계속 붙어있었다. 그래서 세균을 발견했다. 그는 세균을 발견하는 데서 삶의 즐거움을 느꼈다.

공자가 지지자는 불여호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자만 못하다. 호지자는 불여낙지자(好之者 不如樂之者)라.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최고를 지호락(知好樂)이라 했는데 최고를 락, 즐거움에 뒀다.

여기가 신학대학이고 요즘 제 자신이 교회에서도 그런 얘기 많이 하지만 우리가 종교를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마귀가 돌을 내놓으면서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그게 마지막 유혹이었다. 마귀의 마지막 유혹이다. 예수님이 그때 좋다 이 돌로 빵을 만들어 볼게, 그랬더라면 예수님은 오늘날 무슨 바이오 연구자나 경제학자가 됐겠지. 돌 가지고 부가가치인 빵을 만들어낸 사람.

교회에서 제발 오병이어 말하지 말자. 예수님이 얼마나 쓸쓸하시겠나. 영원히 사는 삶의 가치를 군중들에게 막 얘기하고 있었다. 부자 되고 배부른 얘기가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 영원의 말씀을 막 말하는데 가장 아끼는 제자들도 말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꾸 와서 음식이 없는데 어떡하죠. 영원히 사는 말씀을 얘기하는데 먹으면 하루만 지나도 배가 꺼지고 죽어라고 먹어봐야 죽는 육체 가꾸는 건데 말이다. 자기를 쫓아다니는 제자들조차도 말씀보다 먹는 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잘 읽어보세요. 자꾸 빵 먹자고 하니까, 이런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데. 돌 가지고 빵 만드는 건 하수 중의 하수 기술인데 좋다, 가져와라. 5천명 먹이잖아요. 이를 교회에서 잘못 해석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돌덩어리로 5천명을 먹이는 권능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사인(sign)이지 목적은 그 빵이 아니라 죽지 않는 빵, 그걸 주려고 하는데. 말씀하시지 않나.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먹던 사람은 다 죽었다고. 생명의 떡이 여기 있는데 왜 너희들은 죽는 떡만 찾아다니느뇨.

말씀은 뭐에요? 인문학으로 바꿔 보면 실용적으로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인문학은 죽지 않는 최고의 빵을 만드는 사람이다. 먹어서 죽는 빵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건 값어치 없는 거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 말씀 보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 기적을 보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얼마나 쓸쓸하셨겠나? 빵 주시러 오셨어요? 예수님이 무슨 빵가게 주인이요? 그런데 여기 빵 만드는 사람 있다고 오니까, 저들이 왕 되라 할까 무섭다고 산으로 피하셨다.

그때 모든 왕국을 네게 주겠다고 한 번만 경배하라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마귀야 물러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거꾸로 돼서, 지상의 왕국을 준다고 하면 경배하겠다고 한다. 그런 가치의 혼란 속에서 여러분들이 살고 있다. 여러분들이 크리스천이 되고 독실하라는 얘기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패러다임, 죽는 빵과 죽지 않는 빵만 안다면, 인문학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인문학적 공학가, 인문학적 정치가, 인문학적 CEO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원하지 않아도 돈이 생기고 축복이 온다.

저를 보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문학 했다고 죽었습니까? 인문학 해도 이렇게 돌아다닌다. 뭘 걱정하세요 여러분. 예수님 믿어도 베드로, 도마,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도 제대로 산 사람 없고 다 죽었지만 다 성공했다. 다들 와서 빈다, 왕한테는 안 비는데.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된다고 했다.

저는 정말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다. 50년 가까이 하나님 욕하고 성경 욕하려, 쓴 글에도 잔뜩 있어요 볼까 무섭지만, 양을 잡아주지 마라.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양을 왜 잡아주냐. 왜 그랬냐 하면, 6.25 끝나고 너무 절망적이었다. 당신이 만든 하늘, 햇빛, 찬란한 별들, 보는 자체가 기적인데 왜 이 아이의 숨을 거둬 가십니까. 정말 하나님 계십니까.

어렸을 때는 목사님 가서 골려주는 재미가 있었다. 지적인 오만이었는데, 인문학자들이 여기에 빠지면 안한 것만 못하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시고 사랑에 대한 충족을 못 받아서 남이 사랑해 주는 것보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게 했어요. 보면 적개심을 가졌. 선생님, 목사님, 나를 사랑해 줄법한 사람에게는 겁이 나니 도전적이 됐다. 그러니 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공부시간마다 이상한 얘기 묻고 매정하리만큼 했다.

목사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에 여학생 하나 좋아하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가짜 신자가 돼서 갔는데 노아의 방주 얘기를 하는 거였다. 다들 황홀해하고 있는데 목사님,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셨다. 반응이 있으니까. 그런데, ‘하늘 아래 생명은 모두 멸하신 거죠? 방주에 들어간 것만 살았죠. 물고기는 어떻게 됐대요? 거기 들어가면 숨 막혀 죽을텐데요.’ 막 설명하시다가, 결국 사탄아 물러가라(웃음).

인문학은 머리로 생각하는 거라고 했다. 제 또래 사람들이 신식 학문을 배웠어도 꼭 동네에서는 한자 교육을 받았어. 시골에는 꼭 한학 하시는 분들 있었다. 생원, 진사, 이런 분들이 먹고 사는 유일한 길은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 가르치는 것. 왠만하면 거기 보내고 먹을 것 대주곤 했다. 저도 예외없이 한학 하시는 선생님에게 갔다. 형들이 둘인데, 아주 모범생들이셨다. 형은 다들 좋은데 너는 왜 그러나.

비밀인데, 형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소금으로 양치질 하고 나는 짠게 싫고, 이 찬란한 아침을 똑같이 반복하기 싫었다. 저는 원래 새 것을 좋아하고 반복을 싫어한다. 남과 다르게 살려고 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랍비처럼 당시 제사장처럼 레위족속처럼 살았다면, 지금 기독교 2천년 이상의 새 종교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종교로 보지 않고 예수로 봤을 때는 하나밖에 없던 사람 이렇게 본다면, 종교 하나만이 아니라 인문학자가 되건 뭐가 되건 인문학자가 되는 길이다. 어려운 길이지만.

천자문만 배우고 말았다면 인문학자 못 됐을 것이다.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까맣고 땅은 누렇다. 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우고 있더라. 그래서 선생님, 하늘이 왜 까매요? 검을 현이다. 묻는 게 당연한 거다. 왜 가만 있느냐. 애들이 이상하다, 내가 창조적이라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정상이다. 한학자이시던 그분이, 천지현황은 절대 진리니까 우리는 그냥 따라야 한다. 다시 물었더니 밤에 보면 까맣지 하시더라. 그럼 땅도 밤에 보면 까만데요. 그러니까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본다고. 수백 명 내 제자들 중에. 그리고 이 책은 내가 낸 게 아니고 옛날부터 육조판서들 다 천지현황하면서 한자 배우고 그래서 성공했는데. 네가 수백년 두고 내려온 고전 중의 고전에다가 뭘 안다고 트집 잡느냐고. 결국 나가라고 했다. 당당히 나갔다.

그게 단적인 것으로 내가 무엇을 해도 호락호락 믿지 않는다. 지금에서야 왜 하늘이 까맣다고 했는지. 천지흑황이 아니고 현황이라 했는지. 똑같은 검은색인데 흑이라 안하고 현이라 했는지. 현묘하다는 말도 왜 현을 썼는지. 노자가 말씀하신 현, 이 현이 뭐냐. 서당 쫓겨나고 50년 후에야 알았다, 왜 하늘을 까맣다고 했는지. 왜 북쪽에 무덤을 쓰는지, 왜 현무라고 하는지 알았다. 그때 선생님이 너 참 똑똑하다, 그러나 이 현은 흑과는 다른 거야. 가물가물하다고 할 때 현이다. 그래서 검을 현은 가물 현이라고도 한단다. 우리 손에 안 닿고 신비하고 멀리 있는 것을 정신적 색깔로 표현한다면 검은색이라고 한단다. 죽으면 북쪽, 북두칠성. 그렇게 가르쳐줬더라면 노벨상은 한국인이 싹쓸이 했을텐데, 그때 서당에서 날 내쫓아서(웃음).

인문학은 내 머리로 생각하고, 온리(only) 원이고, 생명 가치고. 이게 종교 얘긴 아니라도 알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믿고 따랐는데. 도마가 증명할(identify) 수 있느냐.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다. 마리아가 만지려고 했을 때는 인간의 손으로 더럽히지 마라 그러신 예수님이 도마가 당신이 예수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했을 때는 손을 내밀었다. 만져봐라. 부활하셨는데도 십자가에서 못박힌 상흔이 남아있어서 만져보니 못자국이 있었다. 그때 도마가 엎드리고 당신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그 순간 무슨 논리고 뭐고 필요없다. 상처를 만진 순간 엎드리고 모든 걸 내던져서 그 가혹한 형벌인, 12사도 중 가장 처절한 가죽을 벗겨내는 죽음을 당했던 도마. 지적으로 약삭 빠르고 매사 따지던 그 도마가 어떻게 그런 죽음을 했겠는가. 그렇듯 인문학자는 과학자들보다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인문학자란 뭐냐. 모든 수난과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삶의 가치란 뭐냐. 영원한 빵이 뭐냐. 이를 위해 시를 쓰고 추운 방에서 언 손을 불어 가면서 굶어 가면서. 렘브란트 보세요. 그렇게 배가 고픈데 너무 배고프니 빵 사려다가 그림을 그려야지 하면서 결국 빵집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물감을 사 왔다. 이게 수도승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게 예수님, 하나님이 아니라도 최후의 심판 때 다 쳐 주는 것이다. 예수님 몰랐던 우리 선조들도 착하게 살았다면 다 천국 가는 거에요. 그게 최후 심판이야.

인문학 하다가 왜 자꾸 예수님 얘기 하나. 하늘의 말씀 땅의 말씀 있는데 경영학 정치학 이런 건 땅의 말이다. 인문학은 하늘의 말과 가장 가깝다. 은유(metaphor)를 쓴다. 사랑, 믿음과 같이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건 반드시 인문학적 방식을 쓴다. 철학, 역사, 문학, 모두 숫자로 안 되는 것들이다.

지금부터 시간이 없으니 빨리빨리 퀴즈를 하면서 하자. 이런 내가 하는 인문학, 실제로 이런 게 창조적 상상력이다. 인문학자에게는 누구나 상처가 있다. 구체적인 상처를 안 가지면 추상적이라 상대성 원리니 이런 거 모른다. 그런데 도마라도 만져볼 수 있는, 누구라도 만져볼 수 있는 상흔이 있어서 인문학은 어렵지 않다.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 만져보면 아 이거구나, 하는 삶의 아픔의 고통의 좌절의 가장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상처를 가진 언어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인문학을 읽었을 때 감동이 없다면 학문이 아니다. 물론 수학 보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다. 조금 변태지만. 대부분은 시, 소설, 인문학으로 감동을 받는다.

지금도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면 서재로 간다. 수많은 책이 있는데 아방궁처럼. 수천의 책들이 눈짓하고 윙크하고 뽐내면서 나 읽어주세요. 우연히 꼭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책을 뺀다. 그러고 들여다 훑어보다 눈에 확 띄어요. 그때 벼락처럼 치는 게 있다. 상처를 만져본다. 악 소리 낸다. 그래서 인문학자는 아이 스크림(i-scream) 장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야 한다. 지금도 감동적인 걸 보면 입에서 악 소리가 난다.

제가 생명자본주의라는 말 요새 하는데, 여러 말 안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 모든 생물체는 증식하지만 개체는 죽더라도 유전자들은 전진하지만, 모든 엔트로피는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열역학에서 말하듯 식고 무질서로 돌아가지만 생명은 아니다. 생명은 죽어도 아들이 나고 아들이 나서 끝없이 증식한다. 그런데 돈도 아닌 생물도 아닌 돈이 어떻게 새끼를 치나.

이자라는 게 뭐냐. 소를 맡겼으면 1년 후에 새끼를 치지만 금덩어리를 맡겼는데 이게 왜 새끼를 치나. 도대체 이자가 뭐냐. 어떻게 돈이 맡겨두면 새끼를 낳느냐. 이 한 마디 의문이 돈이 이자를 낳고 이자를 낳고 이런 계산을 해 보니 요셉이 당시 1마르크를 복리로 은행에 맡겨서 2천년 후 이 땅에 다시 왔다면 천문학적인 액수가 된다. 황금이 지구 크기라도 안 된다. 그런데 노동을 해서 황금을 하나 하나 쌓았더라면 팔뚝만한 황금덩어리도 안돼. 그게 버블이고 리먼브러더스 사태다. 이자가 오른만큼. 최소한 3% 성장하지 않으면 돈이 새끼를 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3% 후퇴다. 계속 3% 더 일해야 한다. 그래서 바쁜데 입에서 악 소리 나는 순간 살아있다는 걸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어간다.

요새 엄지족 많은데, 보통 100명 관리해야 한대요. 5분 안에 안 오는 건 친구 아니다. 이 친구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변명거리 만들어 놔야 돼요. 5분 안에 안 보내면 무시하는 거다. 우리가 왜 소통하고 트위터를 하느냐. 정말 정보가 홍수가 날수록 내 머리로 뭐가 행복한지, 금융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살지, 내가 아무리 착하게 열심히 일해도 내 삶이 행복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못 느낀다면. 내 머리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라 내 삶을.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 약속한 대로 인문학을 실제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해 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어린애들 유치원에서도 배우는 시다. 분석하라 하면 어려울 게 뭐 있습니까 한다. 강변이 조금 어렵고, 갈잎은 갈대라고 가르쳐 줘요. 갈잎 찾아보세요 갈대잎인가. 갈잎은 활엽수다. 갈대로 보면 절단나는 거다. 그런 게 인문학이다. 수없이 어린아이들부터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영시는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이상 아무것도 없죠.

이런 생각 들지 않나. ‘형님이랑 아빠는 어디 갔어요?’ 이런 게 인문학이다. 아버지도 있고 형님도 있을텐데. 그리고 ‘살자’고 하니까 지금 안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말에 살자는 말이 있는데, 한국어를 아는 것 같지만 살자는 말처럼 신비한 말이 없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안 한다. 여자 만나서 사랑하고 어쩌고 해 보세요. 닭살 돋아서 못해한다 가만히 있다 야, 나하고 살자. 그게 사랑의 고백이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살자는 독특한 뜻이다. 엄청난 철학이 있다. 살자의 반대는 죽자. 너하고 살자. 너하고 죽자.

놀랍게 한국어에는 살(殺), 죽인다는 말이 없다. 죽인다는 죽다는 말의 사역동사다. 먹다와 먹이다의 관계. 영어에서는 죽이다와 죽다, kill과 die가 전혀 다른 말이다. 우리는 be die, 죽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남을 죽이는 순수한 타동사의 죽인다는 말이 없다. 놀랍다. 일본에도 그런 단어 있다. 한국말은 죽이자,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걔가 죽도록 한 거지. 지가 죽도록 만든 거다. 너 죽을래? 그러잖아요.

문화는 그래서 무섭다. 한국 사람 먹는다는 말 얼마나 많이 쓰나. 힌두어 영어에 보면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다. 한방 먹었다, 욕먹었다, 토끼야 겨울이 되면 뭘 먹고 사냐. 먹는 데 관심이 있다. 먹는다는 게 나쁜 말이냐? 아니에요. 상흔을 만져보듯 만져보는 것, 먹는 것. 여기 물이 있는데 보고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지만 마시면 물하고 나가 없어지고 하나가 된다. 진리나 모든 학문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이 빵이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물론 유월절이라 그러셨지만 이 포도주가 나의 피다, 이걸 마셔라. 이렇게 빵을 먹고 같이 포도주를 먹었다는 것은 내가 그 분의 몸에 모든 것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너와 내가 하나된다는 것. 네가 내 몸 속으로, 내가 네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게 그 완성이다. 인간은 공중전화 유리통에서 외치는 것처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거리가 있다. 이 거리 때문에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인문학이 탄생한다. 너와 나는 아무리 가까워도 그 사이에 얇은 막이 있다. 찢을 수 없는 막이 있는데 사물과 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 간극. 아주 가까이 가도 얇은 존재의 막이 있다. 이걸 찢고 싶은데, 이게 시고 소설이고 역사고 철학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 강변은 생명 공간이다. 엄마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명의 자궁이 있다. 아빠는 생명을 낳는 게 아니라, 싸우고 경쟁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지아비 부(夫) 자가 도끼 부 자에서 왔다. 끝없이 싸워야 사는 사람. 이것이 부성원리, 여성원리. 기독교도 처음에는 마리아, 마르다 하면서 모두 여성원리였다. 그런데 베드로를 중심으로 남성원리로 가면서 여성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애는 지금 아빠 형님을 모델로 강변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다. 마음 속으로는 생명 공간, 생명의 터를 찾아가고 싶은 것. 이걸 말하는 건 남자 어린아이다. 모델이 형님, 아버지인 경우에는 전쟁터,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사는 죽자의 공간에서 사는 것인데 그래서 살고 싶다. 그 유명한 바리리의 시, 바람이 불어온다 아 살고 싶다.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도시 속에서 어머니와 누님의 생명 가득한 자궁을 가진 삶의 젠더 공간, 여성원리가 자연 공간이다.

그런데 왜 그게 강변이냐. 뒤에서 설명하죠.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탁 트인 공간이다. 햇빛이 있다. 모래가 황금빛이라 하니 시각적이다. 전방성, 앞뜰, 광택, 모래 하나하나의 입자, 모두 시각적인데 강변은 전방에 있고 햇빛이 흐르고 황금빛이고 찬란히 빛난다. 그런데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바람이 불고 있다. 여긴 햇빛이 가득 차 있는데 뒤에는 바람이 분다. 대비된다. 청각적. 앞은 시각, 뒤는 청각, 뒤는 산이다. 문 열면 초록색 나뭇잎들이 웅성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 산은 수직이고 강은 수평, 앞은 열려있고 뒤는 닫혀있다. 저게 우리가 몇천 년 살아온 배산임수. 토포필리아(topophilia), 태어나는 탄생의 공간. 그런데 그걸 잊어버렸구나. 그래서 살자고 하는구나.

이 짤막한 시가 우리들에게 왜 인문학적 대상이 되고 배산임수라는 한국인들의 토포필리아가 나타나느냐. 이렇게 좋은 시, 삶의 원천을 그려놓은 건데 학교에선 어떻게 가르치냐. 갈잎을 갈대잎이라 하고. 사전 찾아볼 정도로 어렵지 않으면 풀이해 주지 않고. 아빠 형님은 어디 갔어요? 하면 너 이리 나와 봐. 지금 여러분들이 웃지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르시는 분 있으면 손 들어보라. 안다고 믿지 진짜로는 모른다. 여기다 의자 놓을테니 그처럼 포즈로 앉을 자신 있는 사람 있어요? 수그리고 있는데 어떻게 수그리는지 모른다. 관찰하지 않는다. 관념적으로 아, 그거 알아 한다. 누가 컨닝할 때 생각하는 사람 작자가 누구냐. 로댕을 몰라서 오뎅이라고 쓰고 컨닝한 사람이 오뎅이 뭐야 하고 고치지. 로댕이 뭘 생각하게? 단테의 지옥 맨 꼭대기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뭘 생각하겠나. 지옥의 문에서 전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게 무슨 평화롭고 편안한 자세겠나. 오른쪽 손을 왼쪽 무릎에 대고 있다. 그래서 근육이 저렇게 보이는 것.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근육질이겠나

결론은 뭐냐. 중요한 시간인데 소설 모모에 보면 시간도둑이 있는데 제가 여러분들의 시간 도둑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 한국말에, 한국말 여러분 정말 몰라요. 우리라는 말, 우리에게만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있어요. ‘나’라는 고유어가 없어요. ‘개’가 붙으면 명사가 돼요. 베개 마개 날개. 새가 날지 않으면 뭐가 되나? 인문학적 창조적 상상력을 지금 배우고 있다. 안 날았으면 뭘까. 알을 품으니까 품개. 비가 오면 비를 막으니 덮개. 여태까지 날개를 나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아니다. 알도 품고 비를 막아준다. 인생을 이렇게만 봤는데 다른 쪽으로 보면 거기에 날개의 다른 덮개가 있고 감춰져 있다.

아버지와 형님의 안 보이는 것이 있다. 만져봐야 아는 상흔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숨은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창조적 상상력이다. 그 창조적 상상력이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곳으로 가게 한다. 그때 손을 잡고 함께 가는 자들이 인문학자다. 학교에서 과학을 해도, 가게에서 장사를 해도 인문학적 접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교환가치 소유가치에서도 모든 가치가 생명가치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다른 건 다 수단이다. 이제부터 수단으로 살지 말고 삶의 목적을 살아라. 그게 인문학이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날개가 창조력이라는 창조의 날개다. 지금 7분 초과했는데, 이 7분이 70년을 살 수 있는 하나의 하나님 말씀과는 턱도 안 맞는 얘기겠지만, 작은 겨자씨같은 메시지가 된다면 여러분들과의 만남은 행복하고 영원한 만남 될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