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뱅과 그 시대를 다시 재검토하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부정확한 사실들의 확인 없는 재서술’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수백 년 동안 왜곡 혹은 곡해되었던 점들에 대한 조심스런 재확인, 그리고 이를 바로잡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오늘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때문이다. 이 칼럼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가 될 것이다.

힘 가진 자가 늘 역사를 만든다?

▲2009년 깔뱅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우표.
먼저 하나는 관용, 즉 똘레랑스(La tolérance)에 대한 논의인데, ‘관용’ 특히 문맥상 ‘종교적 관용’이라는 문제는 어느 특정 종교나 종파, 혹은 특정인에 국한하여 집중하고 강조하는 가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벌어졌던 관련 사실들을 가능한 한 넓게 바라보고, 공정한 사실(fact)의 입증과 해석을 거쳐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똘레랑스의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이는 ‘일단 공정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공평하지 않다면 똘레랑스 주장의 의미 그 자체가 무색해진다. 그런 똘레랑스 주장이란 어느 특정 주창자의 사악한 아전인수(我田引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가치와 시점(視點)에서 과거사의 어떤 사실을 통찰하고 해석하여 똘레랑스를 적용하려는 경우라면, 더욱이 이 우주적이며 천부적인 가치를 공정한 평가와 해석이라는 자세를 견지하며 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힘있는 자, 총과 칼을 쥔 무리, 돈과 입을 떼로 갖고서 이를 위력으로 삼는 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상황을 조작하고 사실(事實)을 핍박하며 적반하장(賊反荷杖), 왜곡된 자기 당파 위주의 정의(正義) 강조를 일삼는 행태는 오늘날에도 고통스럽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재가 주목하는 두번째의 문제는 세르베(Servet) 정죄와 처형의 의미에 대한 논의인데, 세르베에 대한 정죄는 결코 쥬네브만의 일방적 결정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전후의 진행 과정이 복잡하여 적어도 2차례 이상, 전혀 다른 법정에서 기소와 심판, 변호와 사실 규명 절차가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정죄의 결정적 근거가 종교적 혹은 신학적 이유 혹은 양심의 자유와 같은 문제 자체 보다, 이 문제와 문제 야기 당사자를 사회적 질서 교란 사범 내지는 윤리적 풍기 문제를 다루는 형태로서, 세르베 주장의 사회적 파급이 야기하는 혼란 우려와 이에 대한 심판, 혹은 이를 차단하려는 사법적 사회적 판단이 다분히 작용하여 해당 사법 당국을 압박했던 점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 무시한 이유 때문에 세르베 사건 전후의 역사 해석상에 엄청난 오류들과 무리한 강조, 그릇된 책임전가, 부분적 사실의 과장 해석을 용인하게 되고, 이로써 빚어진 사실 재구성의 불균형, 불편부당한 평가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진 현상 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재검토 절차로서, 당시 상황의 세밀하고도 충분한 추적과 평가, 객관성과 확실성이 담보된 역사적 실증 자료들을 확인하고 해석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 이 연재의 두번째 논의이다.

▲1572년 8월 성 바돌로메 축제일에 파리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5만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이 학살되었다.

사실상 세르베 자신의 기대, 그리고 전적으로 동일한 ‘동기’는 아니었겠으나 세르베 구명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해 함께 뛰었던 세르베측과 깔뱅측의 노력 모두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세르베 자신의 태도였다. 그가 자신의 이단설을 표방하는 수십 년에 걸친 과정에서 처신한 방법과 태도, 로마 교회와 개혁 교회의 이견 충돌 와중에 형성된 기회를 절묘하게 이용하려 했던 변화무쌍한 초기(初期)의 태도와, 이미 유명 인사가 된 명석한 학자로서의 자의식 관리를 위해 완강함을 구축하는 후기(後期)의 상반된 자세가 서로 엉겨 버리는 타이밍(timing)의 불행한 조합, 그것들이 촉발한 당국과 당시 사회의 위화감과 위기감,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주변 모멘텀(momentum)들의 예민한 대립과 그 사이에서 다시 줄타기를 시도하던 쥬네브 세르베의 무모한 모험과 실패 등등으로 겹겹이 드러나 있다. 그의 처형은 실패한 모험과 패배한 시도들의 귀결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 사건 전체는, 세르베가 신학적 표현과 토론 공방의 형식을 빌어 법리적 논리와 정치 사회적 메니페스토(manifesto)의 경쟁으로 쥬네브와 힘 겨루기를 시도했다가 완패하고 만 매치(match)였다는 관점은, 이 사건 해석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일면이다. 표면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유니테리안 이단설의 주창자로 정죄된 것이 사실이지만 최종적으로 그를 처형한 법정은 종교 재판이 아니었고, 그 소추를 이끌어 간 주체는 교회나 종교계가 아니라 철저히 시의회와 정부 당국이었음을 일부러 외면하려 하면 안 된다. 구명을 부탁하면서도 구명을 시도하는 인사들을 공박하고, 타협을 제안하면서도 어떤 수준의 설득도 완강히 거부한다. 기회의 유효성을 스스로 파괴한 사실을 결국 후회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에 이를 뉘우친다. 이런 전말의 사실(史實)들은 상황의 굵은 맥을 너무나 분명히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다른 목적 때문에 이런 모든 절차적 사실들을 철저히 덮어버리고, 이 사건의 논의 전반에서 수백 년 동안 이를 배제하려 노력해 온 것은 분명 사악(邪惡)한 플롯(plot)이었다. 더욱이 이런 점에 대한 공정한 논의 자체를 반복 회피한 이유가 처음부터 어떤 특정인에게 세르베 정죄와 처형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개신교 개혁 운동과 역사적 종교 개혁의 의미를 심각히 파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했던 것인 한, 이 점은 진지하고 심각한 평가와 재검토로써 속히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과제가 된다.

푸하, 깔뱅이 세르베를? 누가 그래?

이제 본 칼럼이 제시하려는 세번째 포인트는 역사 소설처럼 쓰이고 반박없이 읽혀 널리 파급된 한 개인에 대한 왜곡 사실이다. 그 특정인이 가진 시대사적 의미와 그의 지대한 영향, 인류사에 기여한 엄청난 범위 때문에 이 왜곡 효과의 파장은 자못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져 있다. 요컨데 이 점은 세르베 사건에 대한 깔뱅의 실제 입장, 이에 대한 역사의 반복된 왜곡과 그의 추종자들로 자처하는 이들마저 혼란과 회피에 빠지게 만든 로마 교회의 집요한 프로파겐다(propaganda) 문제이다.

▲깔뱅이 썼던 수많은 개인적 공식적 서신들과 회신들에서 그의 자명하고 일관된 입장과 행동 의지, 그 결과들을 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깔뱅 생가 박물관

우리는 깔뱅이 세르베 사건에 어떤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어떤 수준에서 관여하였으며, 재판 과정 및 정죄와 처형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그의 의지를 실천·행동하였는지에 대하여, 당시에 기록된 역사적 자료들과 진술, 1차적 사료들을 가지고 사실에 입각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이제 반드시 필요하다. 그릇된 해석과 비방으로 시작한 과장 왜곡과 책임 전가, 이 의도적 왜곡을 이용한 감정적 자극으로 다시 반복하는 또 다른 왜곡, 그 왜곡된 주장의 과장 확대와 심화를 통한 왜곡의 재반복, 그 반복된 주장을 근거로 왜곡된 사실들끼리 왜곡 효과를 상승시키며 짝을 맞추는 방식으로 이 왜곡사는 급기야 하나의 운동(movement)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 일련의 엄청난 왜곡,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고도 충돌이 무서워, 혹은 왜곡 문제와의 조우 자체가 ‘더럽다는 듯’ 회피해 버리는 이들의 무책임, 발언에 도의적 학문적 책임을 진 사람들의 게으른 무지와 저급한 인식 태도, 이를 공정과 공평의 근거에서 재론할 의사나 열심이 전혀없는 냉소적 삼자들……. 이들이 모두 합세하여 만들어 낸 ‘세르베와 깔뱅의 왜곡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앞뒤가 맞지 않는 왜곡 내용들을 조화시켜 보기 위해 어떤 정리를 시도하는 왜곡사의 주체들조차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왜곡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깔뱅이 세르베를 처형하는 데 앞장 섰다거나 적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로마 교회 일단의 신학자들·사가들의 의도적인 공격과 왜곡 주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추적·검토해 보아, 완전히 조작된 이 허구의 동기와 목적, 그 효과와 영향, 그 증거들을 드러내어 상식과 양심의 수준에서 최소한의 사실이라도 바로잡아 드러내는 시도를 개시해 보자는 것이 본 연재 칼럼의 세번째 포인트인 셈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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