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권현익 목사(Rev. Hyunik Kwon)는 GMS 파송 선교사로서 20년 가까이 유럽에서 사역해왔다. 프랑스와 프랑스 교회를 위해 관련 선교 단체들과 기관들에서 사역 훈련을 계속하고, 선교 및 교회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특히 서방 개혁 교회의 원형이라 할 위그노와 깔뱅의 사적(史蹟)을 확인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들을 재발견하는 일은 상당 기간 동안 재야(在野) 교회 사학자라 할 그의 전문적·심층적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위그노 사적 원형들과 프랑스어 원문 자료 등 1차 사료들을 취급하는 직접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내외의 학자들과 동료들을 격려하며 이 일에 정열을 쏟아오고 있다. 본지는 역사적 종교 개혁의 500주년을 기념하며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사건’이라는 그의 연구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500년 동안 무엇이 바뀌었는가?

연재 집필자의 평생 동지인 한 친구는 밤과 낮처럼 매일같이 생각나도 또 매일같이 잊혀져야하는, 남국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열도의 동쪽 끝자락, 인구 100여만의 조그마한 신생국 동티모르에 있다.

지난 세기의 끝에 촉발된 해당 지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빌 클린턴과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한국을 비롯한 아세안 각국들이 앞장서서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공조를 이끌어내, 무력 합병으로 수십 년간 강점해 온 인도네시아를 밀어내고 2002년, 금세기 최초이며 유일(현재)한 신생 독립국으로 탄생시킨 나라가 동티모르다.

지난 10여년간 포르투갈어권 브라질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UN 깃발 아래 PKF(평화 유지군)를 파견할 수 있는 각국의 정부 및 비정부(NGO) 차원의 지원을 받아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부분이 외국산의 아이디어와 정책, 산업 전반에 걸친 소비재와 생산재의 해외 공급과 보급, 유무상 지원에 나선 해외 인력들의 지원으로 상당 수준 현대적 국가의 기초를 닦았고, 어느 정도 사회와 공동체의 생기를 집적하는 성과를 내어 놓고 있다.

이 곳에서 역사적 기독교회의 선교적 주초를 놓기 위해 독립 이전부터 차세대 지도자의 양성, 주도적 구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의 대화와 공조, 건강한 커뮤니티의 개발, 영적·물질적 자생력과 자립 능력을 확보한 지역 교회의 설립 및 성장을 위해 수고하는 선교사들이 수 백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 나라, 사메(Same)라는 주도(州都)에서 구교 신자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보이는 수백명 무리가 바로 지난 주일(20th Feb.2011)에 몰려왔다. 그들은 새로 건축한 예배당에 모여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던 브라질인 선교사를 끌어내 살해 위협하고, 그의 사역 차량을 불태우고자 시도하는가 하면, 모였던 교인들을 다 쫓아내고 흩어버리는 일종의 사보타지(sabotage)를 야기했다. 이로 인해 UN 경찰이 무장 투입되어 사건의 확대와 인명 살상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겨우 며칠이 지나, 여러 복잡한 이유와 가정(假定)들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 쪽이 나서서 사건과 상황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그냥 조용히 지나가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저 재발하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아직 살아있고 다 불타지 않았으니 된 것 아니냐고, 그저 조용해지면 그걸로 감사하겠다고.

폭력이 난무하고 죽이고 숨고 도망치고 소리 지르고 하는 동안 문제의 본말은 다 놓치고서 상황 그 자체에만 몰두하여 천착하다 보면 금방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왜 이리로 와버렸는지, 어느 것이 먼저이고 무엇이 정의롭고 중요한 가치인지, 이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바른 해결에 접근할 수 있겠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오늘날 전선(戰線)이라 부르는 선교 현장과 목회 상황,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인격들이 제 나름의 정의와 기준을 들이대며 충돌하는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이런 혼동과 불공정 법칙은 언뜻 유치하게 여겨질 만큼 이 500년 지난 세월에도 전혀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평화 운동 이면의 종교적 갈등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은 당시 이 지역의 가톨릭 주교였던 분과 함께199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라모스 호르타(Jose Ramos Horta)다. 높낮이와 위치, 입장 차이를 불문하고 리더들이든 시민들이든 이 곳에서는 그저 모일 때마다 국제적 공조와 평화를 위한 활동, 대화와 협력, 상호 지원과 교류, 봉사와 희생 등이 아니면 논의할 이슈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해외 유무상 원조와 유무형 지원이 없으면 당장 국가와 사회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지는 사실을 자타가 깊이 인정하며 알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국가와 사회에서 종교는 폭력의 프런트 라인에 서 있다. 실제로지난 2002년 이후로만 해도 여기에서 도끼와 칼에 맞아 죽은 개신교 신학도와 목회자, 종교적 테러에 의해 불구가 된 사역자들을 다 헤아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정도이다. 북한이나 중동 어느 나라가 아니라, 인구의 95%가 스스로 기독교인(카톨릭)이라 믿는 나라에서 백주(白晝)에 일어나는 일들이며, 주위 어느 나라보다 도덕적 종교적 성향이 높고 수준 있다고 자부하는 시민들이 벌이는 일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때리고 죽이고 불질러 놓아도 일 저지른 이는 얼굴도 이름도 없고, 오히려 망가지고 부서진 사람들이 용서를 위해 호소하고 다니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멈출 수도 바로 잡을 수도 없다는 말인가? 지금 여기는 정의도 없고 평화도 없으며, 그것들을 세우고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질서도,절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언제부터 누가 이런 짓들을 야기해 왔다는 것인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따져봐야 이 사건들의 실제와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어떤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이 질문들의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답을 얻는 일이 과연 가능은 하겠는가? 그래도 이런 노력이 계속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정확히, 아주 적확하게, 지금 나온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 보기 위해 이 연재를 시작하고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넓은 시계(視界)를 확보하지 못하면 수백 년을 뛰어넘는 속도에 방향은 잃게 마련이다. 그리고 침착하게 따져보면서 평균율을 찾아나가지 못하면 공정한 기준은 사라지고 금방 감정적 흥분과 논리적 편먹기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자 그럼, 이렇게 시작해 보기로 하자. 필자의 동료 이은택 목사(ACTS 선교부 대표, 동티모르 국립대 교수)는 그가 조탁하는 자료로써 깔뱅의 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었다.

▲개혁자 탄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가톨릭 세력에 의해 화형당하는 안느 듀부흐. 당시 그는 빠리 의회 의원이었고 촉망받던 행정 판사이자 법학 교수였으나, 왕이 부재한 혼란 중에 위그노 말살을 추구한 가톨릭 동료 의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똘레랑스(종교적 관용)? 누가 누구에게 해야하는 말인가. 화형 당하면서 그가 남긴 말은 “형제들이여, 나는 도둑으로도 순교자로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복음 때문에 죽는다”였다.

깔뱅의 시대, 세계사와 한국사에 대조해 보면…

16세기 초에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면서 잉카제국이 멸망하고 마야 제국이 붕괴의 길에 들어섰다. 중국은 명(明)이 그 250여년 역사의 정점에 이르렀고, 일본은 전국시대로 토요토미가 등장하는 시대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중동을 막 장악했던 이때, 이미 절대 왕권이 군림하던 영국·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 형태로 존립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시기는 중세 봉건 시대의 피로감이 극도에 달하면서 절대 왕권이나 종교 권력의 혹독한 지배가 종국으로 치달아 인류사를 새롭게 전개할 프랑스 대혁명이나 근대 산업 혁명과 같은 변화가 바야흐로 백수십 년 안에 다가서 있었고, 그 여명을 밝히는 불씨가 이미 이곳저곳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혼(spirit)이라 해야 할 인문주의가 풍미하고, 인권과 시민의 주권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불길처럼 펄럭이며, 종교와 절대 왕권의 과도한 지배로부터 이탈해야 할 필요를 강력하게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런 전환기에는 불가피하게 따가운 고통과 날카로운 희생의 지불 요구가 먼저 달려든다. 시대와 사조, 레짐(regime)의 이런 전환에서 요구되는 당위적 지불 요구는 항상 공동체들과 사회, 국가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인명(人命)의 처절한 붕괴와 재배치, 조정과 재편성이라는 형태의 시련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도적 가치관이나 인간 중심적 세계관, 현대적인 윤리기준을 잣대로 저 500년 전의 변화와 갈등, 혼탁을 직접 해석하고자 들이대는 일은 당연히 우리를 시대 이해의 넌센스(nonsense)에 빠뜨리고 만다. 종교 개혁의 상황적·유형적 의미를 통찰하려는 이 시도에서 이런 레귤레리션(regulation)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사실을 검토하고, 오늘날의이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 시착점의 높이를 공정하게 조정하여 그 실제를 해석해 내려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시대의 간극, 레귤레이션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라는 위대한 군주가 떠난지 불과 3년 만에, 조카와 그의 충신들을 무참히 격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우리 역사가 품은,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그 50여년 굴곡 후에 한국사(韓國史)에서는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반정을 통하여 재위에 오르는데, 이 즈음에 깔뱅(1509~1564)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중종(재위1506~1544)은 조광조라는 젊은 사림(士林)을 특별 발탁(1515)하여 선대에서 벌어진 혼탁한 역사를 바로 잡아보려는 개혁 운동을 추진했던 군주인데, 조광조는 불행하게도 그 중종에 의하여 반역의 누명을 쓰고 사사(死士)되고 말았다(1519).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하는데, 조선조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개혁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이 조광조의 개혁 운동은 그 참신했던 개시에서 허무한 종국까지 불과 4년(1515~1519)을 버티었을 따름이다. 기묘(!)하게도, 소위 역사적 종교 개혁의 직접 촉발점이 되는 마르틴 루터(M. Luther)의 비텐베르그 95개조 반박문 게시 사건이 이 조광조 개혁 운동 4년기간의 한가운데(1517)에 위치해 있다(그 50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깔뱅이 기독교강요(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를 출판하던 때는 조선 유학자들이 향약을 제정하여 성리학을 대중화하여 공동체와 개인의 실천 운동으로 전개하고자 기치를 올리던 때였다. 중종에 이어(인종 잠시 재위) 재위에 오른 임금이 명종인데, 그는 즉위하던 그 해(1545)에 을사사화(乙巳士禍)라는 또 한 번의 사림 숙청 사건을 일으켰다. 이 때는 깔뱅이 쥬네브에서의 정착에 1차 실패하고 추방의 형식으로 스트라스부르로 축출(1538)되었다가 3년 만에 복귀한 때로서, 10여년 동안 세르베 주도로 깔뱅과 서신을 교환하던 기간에 해당한다. 깔뱅이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를 떠나 다시 2차로 쥬네브에 들어온 때가 1541년이며, 목회자와 신학자로서 정치 개혁의 사상적 소프트웨어(software)를 제공하면서 이상적 도시 쥬네브 건설을 위해 자문하던 깔뱅이, 18년이나 지나 드디어 쥬네브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경의와 존경의 차원을 넘어 학술원 설립의 자격 요건을 갖게 되고, 개혁 사상을 반영·실천하는 엑티비스트(activist)로 활약할 수 있게 된 때는1559년이었다. 유명한 세르베 재판과 처형사건은 그 보다 6년쯤 전인 1553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불과 5년 후인 1564년 깔뱅은 소천하는데, 그 2년 후인 1566년에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출생한다. 또 한 사람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조선조 군주인 선조가 1567년에 즉위하고 1608년에 별세하므로, 1616년에 죽은 셰익스피어는 우리 역사에 대조하자면 선조재위 기간 동안 살고 활동한 셈이 된다. 이 시대의 수십 년 어간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차례로 나타나 세계 문예 사상 그 의미가 지대한 조선 성리학을 대성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에 두 차례의 조일 전쟁이 벌어졌고, 서양사 최고의 제독 넬슨(Nelson)을 무색케 하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깔뱅의 쥬네브 개혁 운동의 40~50년 후 쯤에 위치하는 셈이다. 모짜르트는 1756년생이므로 깔뱅의 쥬네브 활동 시기보다 200년 정도 후에 위치해 있고, 나폴레옹은 깔뱅 개혁 기간의 210년 후인 1769년에 태어나 1800년에 세상을 떠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시대 이후에 활동한 것으로 기억해 두면 좋겠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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