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예수님의 통곡

그러므로 예수님은 빌라도 앞, 즉 죽음의 직전에는 더 담대하시다. 그러나 그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 전체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는 고민 뿐만이 아니라 더한 모습으로 나가시었다. 즉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브리서 5:7). 예수님의 울음은 나약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경외의 표시였다. 그리고 그의 눈물로 드린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 그 응답은 오늘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성숙이었다. 이와 같이 심한 통곡과 눈물 부분만 보고 거기에서 멈추고 판단하기를 감정도 조절 못하는 약한 사람이라고 취급하면 너무 조급하다. 그 통곡과 눈물의 이유와 그 결과를 함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하게 채찍에 맞도록 한 후에도 자신의 판결에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에 대한 꿈을 꾸고 예수님을 해하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한 이야기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마태복음 27:19). 그에겐 범상치 않은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남들 같으면 살려 달라고 애원할 텐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빌라도는 한 번 더 묻는다. “너는 어디로서냐?”(요한복음 19:9). 예수님께서 또 침묵하시자 조급하여 묻는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9:10).

그제서야 예수님은 입을 여신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요한복음 19:11). 예수님의 관점은 늘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관성이 있다.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확신이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께 있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면서 빌라도는 더 주저했고 예수님을 풀어 주려 애썼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세 번씩이나 선포하지만(누가복음 23:4, 14, 22; 요한복음 18:38, 19:4, 6), 끝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함성을 인하여,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판결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통곡할 때 통곡하시고, 침묵하실 때 침묵하신 분이다. 적절하게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이 적절함의 의미를 스님은 아실 것이다.

우리는 자주 내가 이해되는 그 부분적인 것들만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다인 것처럼 유치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기 전 내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글의 한 가지를 인정했으면, 다른 것도 인정을 하는 것이 옳다. 영적인 이해를 못하여 인간적으로 이해하여도 좋다. 그 인간적인 논리로라도 전후 문맥을 살펴 전체성을 살피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제자들, 빌라도, 그리고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

스님보다 더 혼돈에 빠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암호를 해독했다. 스님보다 더 기독교에 적대감에 빠졌던, 예수의 적 바울이 변화되고 예수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이 모두는 십자가의 암호가 해독된 다음에 나온 진리의 힘이었다. 십자가의 암호가 해독이 되면, 이해가 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질문도 했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하고, 예수를 죽임으로 자신의 구원도 소멸시켰다.

그때나 오늘이나 혼돈의 상황은 같다. 그리고 암호 해독 방법도 같다. 아니 이제 더 쉽게 암호 해독이 가능해졌다. 여러분은 이미 많은 암호를 해독했다. 해독된 암호를 소유한 자가 되었다. 서언에서 살핀 예수를 못믿는 이유들에 대하여 답을 생각하자면 이러하다.

먹고 사는 일에만 바쁘기에 우린 예수를 믿어야 한다.
종교란 다 같지 않기에 믿어야 한다.
조상은 몰라서 못 믿었지만 이제 후손을 위하여 믿어야 한다.
일부 예수쟁이들의 행동이 거슬릴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온 성도들과 현대에도 참으로 예수를 믿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믿어야 한다.
성경의 예수는 인간의 지식과 합리성으로는 이해가 않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불합리성이 우리의 합리성보다 우리를 더 온전케 하고 행복하게 함으로 믿어야 한다.
성경의 말씀하는 바들이 참이고 예수가 실존했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기에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위하여 이 책을 통하여, 그리고 교회의 예배 시간에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예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그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죽어 갈 사람들이 있다. 잠시 호기심으로 찾다가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한복음 8:21). 예수님의 통곡은 그래서 그런 사람을 인하여 계속된다.

진리에 대하여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말 몇 마디 대신 자신을 통채로 답으로 주셨다. 이제 먼저 그 진리를 통채로 받고 암호를 해독한 우리는 과연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묻는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젠 우리가 말 뿐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답할 때이다.

해독된 암호: 암호 생성기, 암호 해독기로서의 예수님

우리는 지금까지 크게 두 가지, 예수님이 누구이고 왜 십자가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암호화되어 있기에 다음 세 가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첫째는 성경의 핵심 비밀의 부분은 고도의 영적 암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의 해독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 해독 방식에 근거하여 해독된 암호는 예수님이 진정한 구원자이며 그 구원의 핵심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누가복음 24:44)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들을 대조해 봄으로 살펴 보았다. 특별히 이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남기신 일곱마디와 대입하여 보면서 살펴 보았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번역)라 말한 것이 실현된 것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암호 해독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골로새서 2:2)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비밀”(골로새서 4:3)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암호였으며, 암호 생성기였으며, 암호 해독기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셨다. 그것으로 예수님과 십자가의 암호는 영영히 사라진 것일까? 그래서 성경의 암호가 어려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죽음은 사실 창세기부터 주어졌던 가장 중요한 구원의 암호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바호 인디안의 영화 속에서 암호병이 죽으면 그 암호의 생명도 끝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암호의 완성이었고, 새로운 암호 해독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부활하시었고, 그의 암호들이 우리에게 살아 나고 있다.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 북 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