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진리가 무엇?

예수님의 진리에 대하여 당황스러움을 가지고 질문하는 스님은, 한때 예수님께 직접 진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던 빌라도를 기억나게 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최후 판결을 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것은 참으로 빌라도의 축복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진리에 대하여 물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그는 참으로 정답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물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말로 답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자 빌라도는 답을 기다리다가 머쓱해져서 유대인들에게 나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빌라도는 정죄 전문가들인 유대의 대제사장, 서기관과 장로들 앞에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한다. 그러나 빌라도는 안타깝게도 더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과연 예수님은 답을 주시지 않은 것일까?

정답을 주신 예수님

그렇지 않다. 답을 주셨다. 그러나 빌라도가 그것을 정답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답은 무엇이었는가? 빌라도의 이 질문은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미 주고 있다. 14장에서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이렇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 6).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암호로 진리에 대한 답을 주신 것이다. 그 암호를 해독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통째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답을 회피하시거나 답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는 진리

몇 마디의 말로 진리를 설명하기보다, 진리를 통째로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말 몇 마디로 답을 얻으려 기대했던 빌라도는, 자신이 기대했던 정답이 아니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귀로 들으려고만 기대했기에 정답을 눈으로 보면서도 정답인지 몰랐다. 암호가 해독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3장에서 살핀 하나님의 형상성 속에 담긴 암호로 진리가 무엇인지 답을 주셨지만, 그것이 암호인 줄도 빌라도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쉽게 포기한 질문

아쉬운 것은 빌라도가 진리에 대한 답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자신을 온전히 구원해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한다. 또한 그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쉽게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자신이 이해한 만큼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중상하고 모략한다.

삶 전체로써의 진리

예수님은 진리의 암호를 몇 마디 말로 설명하시기보다 삶 전체로 보여 주신다. 본체가 하나님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신 사랑의 진실, 그리고 남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지만, 남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하여 죽으시는 진리의 사랑을 삶 전체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얄팍한 철학적 사변과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익숙한 빌라도가 그런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좋은 질문을 하는 그에게 좋은 답을 주시지만 빌라도는 끝내 그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정체성, 예수님의 진리는 암호로 감추어져 버린다. 해독이 필요한 암호로 남아 오늘도 사람들은 진리를 묻는다. 그 질문을 하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진심으로 진리를 찾는 이들이 성경을 통하여 차근차근 암호를 풀 수 있도록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암호를 성경 역사 전체를 통하여 주시고, 그 해독을 위한 실마리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여 주셨다. 문제는 그 암호가 주어진 방식을 알아내고, 그 방식에 의하여 암호를 해독해야 되는 것이다. 빌라도가 18장에서 질문한 답을 예수님은 14장에서 주고 계신다. 빌라도가 그 답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성경이 있음으로 그 답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축복이다.

진리의 속성

진리의 속성을 알면 왜 하나님과 예수님이 진리인가를 알 수 있다. 진리는 모임의 회칙이나 제품 생산 관리 규범과도 같다. 회칙과 진리의 차이점은 이것의 적용 범위의 크기에 달려 있다. 회칙이 회원들에게 국한된다면, 진리의 최대 적용 범위는 전 우주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우주의 창조, 운행 법칙부터, 각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적용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물체의 공존, 성장과 번영의 법칙이다. 진리엔 여러 속성들이 있는데, 특별히 공동체를 전제로 하기에 진리엔 공의의 부분과 사랑의 부분이 중요시 된다. 이 법칙은 우주에 속한 모든 생명체들을 성숙시키고, 자유케하고, 공존케 하고, 번영케 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것과 지엽적이고, 속박하는 것, 파괴적인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부분적이고 사탄적인 것 또한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그것이 실천, 혹은 실현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진리는 강한 실천력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빛이 있으라 하면 있는 것이 진리의 힘이다. 그리고 그 빛은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것은 창조를 통하여 증명이 되었다. 진리는 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구체적인 공의로 적용되고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는다. 그러므로 남을 위하고 격려하고 생명력을 주는 사랑 속엔 깊은 하나님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랑의 진리, 진리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표현된 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악, 거짓, 죽음, 사탄의 종이 되었던 인간들을 다시 자유케하고, 성숙시키고, 온전케 한다. 그리고 전 우주의 악과 혼돈을 제거하며, 전 우주에 샬롬, 즉 온전한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의 진리와 진리의 사랑이 재현된 제2의 창조인 것이다.

빌리도의 혼돈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는 최고의 진리의 사랑, 사랑의 진리가 펼쳐지는 현장의 무대 감독이었지만, 그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스펙타클한 드라마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였다. 로마인인 그에게 진리는 학자들의 장엄한 철학 속에 있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군인인 그에게 진리는 군사력, 정치적인 권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틀 속에서 진리를 이해하려 한다. 오늘날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성경을 통해 진리가 선포되지만 그 정답을 정답으로 인정치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라던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의 혼돈

스님의 예수님에 대한 조소도 그런 심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은 예수님께서 내 잔을 옮겨달라 기도하면서 겁내시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신다. 불교에서 수행을 중시 여기고 감정을 죽이는 것에 익숙하기에 감정 표현하는 것을 경망스럽게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께서 조금 인내를 가지고 몇 절의 성경을 더 읽으셨으면 좋았을 뻔하였다. 왜냐하면 스님께서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나약해 보이는 모습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의 나약함이었다. 그러나 죽음 판결을 내리는 사람,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신 것을 구분할 수 있었어야 했다. 겟세마네 동산의 밤에 예수님은 죽음의 최종 판결자인 하나님 앞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민하면서 기도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전에 말씀하신 바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 (마태복음 10:28)라는 말씀에 근거를 둔 행동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의 전체성을 알고 계시었다. 이땅과 천국 그리고 지옥의 전체성을 알고 계시었다.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 북 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