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앨범을 덮었다. 20여 년 전의 일로 아직도 가슴이 아플 수 있다는 건 뭔가. 진실, 순수… 냉장고를 열어 얼음이 있나 본다. 겨울이라 얼음 통을 들여다 본 지 오래다. 다행이 얼음이 있다. 나는 커다란 머그잔을 꺼내 가득 냉커피를 탄다. 단숨에 들이키자 두개골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전도사… 나는 인터넷으로 전도사를 검색해 본다. 전도사의 자격, 전도사의 진로, 전도사의 급여… 어느 곳에서도 강희와 어울릴 수 있는 수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녀가 신학대학을 다시 들어가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했단 말이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그녀의 남편은 재호 형일까… 나는 그 밤 이후 꼭 필요한 수업 이외엔 친구들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하고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나는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들을 순례하며 몰래 청강하며 소설을 쓰는 모든 기교를 습득하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불문과인 강희를 캠퍼스 안에서 본 것은 그 후 단 두 번이며 그것도 먼 거리였으므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재호 형은 부득이 시험기간엔 같은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서로 외면했다.

몇 번인가 그가 다가올 듯 망설이는 미세한 흐름을 나는 분명 감지했다. 수업시간에 대각선으로 앉은 그의 시선이 그 예전의 뜨거움으로 다정함으로 그리움으로 강렬하게 호소하듯이 허공에 얽혀 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울컥 떠오르는 감정들을 누르면서 침을 삼켰다. 심장은 그물 안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요동쳤다. 이성이란 것, 답습된 관습의 모형이란 것, 이 따위 것들이 아무 것도 없는 백치라면 단지 현상에 울고 웃는 아기라면 나는 일어나 달려갔을 것이다. 그의 품안으로…, 그러나 그는 이제 강희의 남자였다. ‘그것 봐, 바보야. 조심하랬지!’ 그녀를 경계하던 여학생들은 모조리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나기가 내리는 날마다, 비가 내리는 모든 날마다 우울증과 편두통으로 몸살을 하며 괴로워했었다.

나는 혜자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그 전도사라는 여자 있잖아?”
“누구? 어느 전도사님?”
“아니, 교회에 전도사가 그렇게 많아?”
“그럼, 아! 아까 만났던 이강희 전도사님 말하는구나. 왜?”

그러나 나는 그다음 말을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기 싶지는 않다. 잠깐 심호흡을 한다. 헛기침 두 번 쯤을 애써 만들어 뜸을 들이다 짐짓 태연한 척 목소리를 꾸며 말한다.

“수녀들은 결혼 안 하잖아. 전도사는 어때? 그냥 소설 소재로 흥미 있을 거 같아서……”

오! 그렇다. 나는 소설을 미끼로 여자 전도사의 일생을 얼마든지 염탐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 우리 개신교는 가톨릭하고 달라. 결혼은 자유지. 아니 오히려 결혼을 해야지. 그래야 정상 아니야?”
“그럼 그 전도사도 결혼했어?”
“아마 내가 알기로는 남편이 결혼하고 얼마 안 있다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 딸이 지금 중학생이야.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몰라.”
“왜 죽었대?”
“교통사고일 거야. 아니 그건 그렇게 갑자기 왜 그렇게 궁금해. 아까는 신경이 날카로워 가지고 신경질이더니.”
“아니, 언닌. 내가 언제 신경질을 내. 아파서 그랬다니까. 미안해. 혜자 언니. 근데 혹시 남편에 대해서 알어?”
“아니.”
“상당히 미인이던데 재혼은?”
“여봐요. 작가 양반님. 소설을 쓰시려면 직접 인터뷰하세요. 난 잘 몰라. 그저 이강희 전도사님이 얼마나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사는지 그런 것 밖에는. 아, 몇 달 전 교회 월간지에 이강희 전도사님 간증이 실렸는데 그거 찾아 보면 되겠네!”
“간증?”
“응, 자기가 어떻게 해서 교회를 나오게 됐고 하나님이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만지셨는지 하는 사연을 말한 거야.”
“언니. 나 꼭 그거 구해다 줘, 그러면 언니네 교회 당분간 계속 나갈 테니까. 언니 꼭! 나 지금 소설거리가 많이 필요해. 부탁 부탁!”
“당분간이 얼마 동안인데? 음, 최소한 1년은 우리 교회에 나와야 한다. 그러면 내가 찾아 보지.”
“알았어. 알았어.”

언니는 그날 밤 안으로 의기양양하게 내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이거 안 버리고 어떻게 잘 모아 놨네. 하나님이 우리 은정이를 엄청 사랑하시나 봐. 이젠 너 1년 동안은 군말 없이 우리 교회 다니는 거다. 할렐루야!”

언니는 하하하 즐겁게 웃으며 책을 던져주고 씩씩하게 사라졌다. 나는 《행복한 우리 교회》라는 월간지를 펼쳤다. 목차를 훑기도 전에 이강희라는 이름 석 자만이 돋을 새김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쉰다. 책을 내려놓는다. 냉장고로 가 얼음을 꺼내 다시 머그잔 가득 냉커피를 탄다. 오한이 나는 듯 한기를 느끼지만 털스웨터를 껴입고 얼음이 가득한 냉커피를 마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 피가 도는 듯한 추위와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다. 생리통처럼 아랫배가 갑자기 아프다.

나는 거실의 모든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는다.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불만 밝히고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이강희 전도사 간증문, 그 빛 아래」 나는 아주 천천히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의미와 행간까지 노려보며 읽어 나갔다. <계속>